은미씨의 한강편지 96_우리는 함께 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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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 coophangang 등록일21-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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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미씨의 한강편지 96
우리는 함께 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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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분다 여보.

오늘도 비가 내릴 것 같아코 끝으로 습기의 냄새가 느껴지네올 봄에는 비가 너무 자주 내렸지비는 우리에게 추위와 허기를 연상하게 하지우리가 처음 만난 것도 바로 비와 추위와 허기그 모든 것들이 함께 있던 날이었지.

그 날내가 당신을 처음 본 날, 2월의 찬 비가 내리는 날이었어겨울의 끝자락이었지만 봄은 멀어 보였어나는 며칠 먹을 것이 없어 기운이 없었어냉담하게 얼어 있는 땅을 발로 긁어 나무 뿌리를 파보기도 하고 시든 잎을 뒤적이기도 했어허기가 뱃속에서 메아리처럼 아우성을 치면 갯골로 나가 물을 마셨어.

비가 내렸지만 가만히 누워 있는다면 죽을 지도 모르겠다 생각했어더운 숨을 쉬는 살아있는 목숨이 간절했어온기를 품은 생명체나는 날 것을 물어 내 허기를 채우고 싶은 욕망에 아득해지곤 했어.

터벅터벅 걸었지만 내 발자국 소리는 어디에도 들리지 않았지그저 바람 소리빗소리가끔 울음 울어대는 새소리만 들릴 뿐이었어하릴없이 내딛는 발걸음비는 사납게 내리지 않고 가만가만 내릴 뿐이었지만작은 화살들처럼 나를 찔렀어나는 빗줄기에 맞설 힘조차 없었으니까.

더운 숨결살아있는 목숨의 냄새그래나는 당신의 모습 이전에 숨결을 먼저 느꼈어찬 빗줄기에 은근하게 다가오던 목숨의 냄새내 심장이 뛰었어당신을 보기도 전에당신이 누군지도 모르면서나는 이 곳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순간 알았으니까어쩌면 나의 지독한 외로움을 나눌 존재가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당신을 보기도 전에 나는 당신과 사랑에 빠진 거야.

이렇게 말한다고 당신은 실망스럽다고 할까?
그러니까내가 아닌 그 누구였어도 상관없는 마음이었나요?
당신은 이렇게 물어볼까?

나는 희미한 냄새가 나는 방향으로 몇 걸음을 옮겼어그리고 이내 보았지작고 지친 흰 몸을 지탱하고 유령처럼 외로이 서 있는 당신을.

당신의 허기진 배당신의 거칠어진 털당신의 작은 다리그리고 비로소 마주친 당신의 쓸쓸한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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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함께 살았습니다.
그와 나우리는 함께 살았습니다두 번의 겨울두 번의 여름을우리는 서로 의지하며 살았습니다.

찬 비가 내리던 어느 2월에 우리는 만났습니다우리는 바로 알아보았습니다서로의 허기와 외로움을.

우리에게도 한 때 가족이 있었습니다먹여주고 어루만져주고 돌봐주는 손길이 있었습니다그러나 어느 날 내 가족은 나를 차에 태우고 한참 집에서 먼 곳으로 갔습니다내 가족이 나를 내려준 곳이 이 곳입니다내 가족은 나를 돌아보지 않고 바로 차를 출발시켰습니다.

뭐가 잘못되었을까... 자책과 두려움으로 꼬박 하루를 차를 내린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그러나 내 가족은 나를 데리러 오지 않았습니다나를 가족으로 들였던 그들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원망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비록 나를 버렸지만나는 그들을 그리움으로 회상합니다.

우리 잘못이 아니야
역시 버림받은 그가 내게 말했습니다그 말에 나는 한참 울었습니다그는 울고 있는 나를 두고 멀리 허공을 바라보며 내가 울음을 그치기를 기다렸습니다울음이 잦아들고 나자 그가 나의 얼굴을목을 핥아주었습니다조심스럽고 신중하게마치 다치기 쉬운 존재를 다루는 것처럼 그는 나를 정성스레 핥아주었습니다따스한 혀가 나에게 닿을 때 내 눈에서는 소리 없는 눈물이 다시 흘렀습니다내 눈물은 그의 혀에까지 닿았습니다.

우리는 함께 살았고 온기를 나누었지만 허기를 채울 수는 없었습니다목숨 있는 것들에게 끝없이 천형처럼 찾아오는 허기어느 날 나는 그를 두고 혼자 나섰습니다언제부터인가 우리가 사는 장항습지에 찾아와서 먹을 것을 갖다 두는 사람을 보아두었으니까요.

허겁지겁 먹었습니다다 먹어치우고 나서야 그에게 미안했습니다허기는 공평한데먹이는 혼자 먹었으니까요놓인 음식을 다 먹고 나자 그제야 주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나는 사람이 만들어둔 덫포획틀에 갇혀 있었습니다문은 닫혔고 나는 나갈 수도 없었습니다두려움이 일었으나이내 체념하는 마음도 들었습니다이 포획틀이 나를 어딘가로 데려다 주었으면… 더 이상 허기와 추위와 싸워도 되지 않는 그런 곳으로내 가족이 있던 삶으로 나를 다시 데려다 주었으면…  

정오의 해가 기울어 오후가 되도록 사람은 오지 않았습니다대신 그가 나를 찾아냈습니다그는 고라니의 흔적을 쫓아 아침 일찍부터 멀리 나갔던 차였습니다쇠창살 안의 나와 밖의 그가 눈이 마주쳤습니다원망의 눈빛은 없었습니다그는 대체 무슨 일이냐고 눈으로 나에게 물었습니다내가 대답도 하기 전에 그는 내 옆에 놓인 텅 빈 밥그릇을 보았습니다.

해가 지기 전에 한 남자가 나타났습니다그는 서둘러 우리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재촉했습니다그는 우리에 갇힌 나를 보았고 이내 밖에서 나를 지키고 있던 내 남편을 보았습니다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내 남편에게 천천히 다가갔습니다남편은 아무런 경계도 없이 그를 맞았습니다그의 손길에 머리를 맡기고 그의 다정한 말을 조용히 들었습니다.

남자는 내가 갇힌 포획틀의 문을 열었습니다그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내 옆으로 들어왔습니다그리고는 이내 나의 얼굴을 핥아주었습니다잠시 물러가 있던 남자는 물을 담은 그릇을 가져왔습니다나는 물을 마셨습니다마치 영혼 깊숙이 목이 말라 있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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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온다 여보
비가 온다 여보.

우리는 함께 머물고 있다이곳은 낯설다어디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갇힌 상태이고 앞날을 알 수 없지만허기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니 안도한다그리고 우리는 함께 있으니까우리는 헤어지지 않을 것이니까.

우리에게 남아 있는 나날이 얼마나 될까그것은 우리가 알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한때 우리의 가족이었던 인간들이 정해줄 것이다우리는 인간들의 정해주는 운명에 순응하는 것밖에 도리가 없다그들은 우리들의 절대자우리를 길들이고 우리를 반려로 삼거나 우리를 버리는 것도 그들의 선택이니.

비가 오래 올 모양이다 여보.

*지난 5월 31일 장항습지에서는 들개 한 마리가 구조되었습니다그러자 암캐를 지키러 수캐가 나타나서는 자리를 뜨지 않았습니다포획틀을 열어 주자두 마리 들개는 함께 머물렀고요.
한강조합은 장항습지의 생태계보전을 위하여 포획틀을 설치하여 고라니와 같은 야생동물들을 잡아먹는 들개들(유기견들입니다.)을 습지 밖으로 데리고 나오고 있습니다. 2년여 동안 성견 5마리새끼 두 마리를 데리고 나올 수 있었지만 데리고 나와도 걱정이 많습니다이 들개 두 마리는 현재 고양시 동물보호센터에 머물고 있습니다입양이 되면 최선인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2021.06.14.
한강조합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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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6.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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