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례한 사람들
이게 다 염키호테 님 때문입니다.
어제는 종일 햇살이 아늑하고 대기는 파랑 하늘에 초록 물감을 흘려 놓은 듯 눈부신 날이었습니다. 틈틈이 창밖을 흘끔거리다 급한 일들을 얼추 마치고 오후 늦게 가벼운 산책을 나섰습니다. 해가 떨어지기 전에 이 봄날 숲길의 고적함을 누리고 싶었거든요.
느릿느릿 걷고 자주 멈추었습니다. 허리를 굽어 벌써 노랗게 피어난 애기똥풀을 들여다보고, 가시를 피해 연한 찔레나무 잎을 톡톡 건드려 보았으며, 라일락 꽃 가지 끌어당겨 향기도 킁킁 맡아 보았습니다. 실개천 아래서 유유히 노니는 살진 잉어를 한참 보았고, 청둥오리 한 쌍을 숨은 듯이 서서 바라보면서 “오리야, 오리야” 작게 불러 보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나무 데크나 벤치에 앉아 쉬기도 하고, 숲 안쪽 오솔길을 두어 명씩 걷고 있습니다. 이토록 좋은 봄날이라니…
그냥 그렇게 나무와 꽃과 잉어와 새들만 쳐다보고 걸으면 좋았을 텐데, 걷다 보면 눈에 거슬리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게 다 염키호테 님 때문이지요. 그와 종종 같이 공원을 둘러보면 숲을 즐기는 사람이 아닌 영락없는 ‘공원관리인’의 눈으로 산책을 하니까요.
“선생님, 여기서 쑥 캐시면 벌금 나옵니다. 생태공원입니다.”
“거기 보호구역이예요. 일부러 막아 두었는데 왜 들어가셨어요?”
일전에 대낮에 노상방뇨하는 아저씨들에게도 꼬박꼬박 ‘선생님’이라 칭하며 말리다가, 반말에 드잡이라도 할 기세여서 봉변이었는데, 그는 여전히 무례한 이들에게도 늘 ‘선생님’하며 말립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벌써 환삼덩굴이 올라왔네....” 하면서 산책 중에 쭈그려 앉아 풀을 뽑기도 하고, 맨손으로 쓰레기를 줍기도 하죠. 저도 엉거주춤 따라하게 되고요.
어제는 나물을 몇 줌 쥐어뜯으며 점퍼 주머니에 구겨 넣는 아주머니를 만났고 (“나물 채취하시면 안 됩니다.” “그래요? 몰랐어요.”), 숲 속으로 아무렇게나 자전거를 끌고 가는 아저씨를 만났습니다. 저도 어느새 공원관리인이 됩니다.
“선생님, 자전거 도로는 저쪽입니다. 숲으로 끌고 가지 마세요.”
아저씨는 못 들은 척 그냥 갑니다.
“저기요. 그 쪽으로 가지 마시라고요.”
제가 약이 올라 뒤통수에 대고 소리칩니다. 그러자 남자는 돌아보고 반말로 대꾸합니다.
“아니, 내가 이 앞에 살아서 이리로 가는 건데, 그리고 내가 지금 자전거 탔어?”
대거리를 더 하다가 불쾌해질까 싶어 돌아섰습니다. (그나저나 어떤 아저씨들은 왜 초면에 반말을 할까요?) 멋쩍은 마음에 물가에서 오래 잉어들을 바라보았습니다. 근처를 지나던 다른 아저씨가 제 옆에서 멈춰 서더니 혼잣말처럼 말합니다.
“여긴 물이 맑으니 물고기들이 참 많아.”
#친절한 나무들
무례한 사람들도 있지만, 세상엔 친절한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요. 저는 친절한 사람들을 ‘친절한 나무들’이라고 부르고 싶어집니다. 나무들은 무조건 베풀고, 나누어 주고, 다정하니까요.
한강조합에는 아낌없이 주는 ‘친절한 기부 나무’들이 있습니다. 샛강에서 자원봉사를 꾸준히 해주시는 장영탁 선생님은 며칠 전 기후투어 강사료를 전액 기부해주셨습니다. 노자생태교실에 수강생으로 왔던 신석원 한강 감사님도 기부금 봉투를 건네주고 가셨고요. 노자생태교실을 열어 주신 김영 고문님은 사례비 없이 그저 동학들을 만나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신다며 오히려 자꾸 선물을 가져다주십니다. 이번에 출간한 책 “고전에 길을 묻다’도 조합원들에게 선물하라며 많이 가져오셨습니다.
기부금이나 봉사가 아니더라도, 샛숲학교나 기후실천투어에 열심히 참여하고 좋아해 주시는 분들도 모두 친절한 나무들입니다. 즐겁고 유익했다고 상기된 얼굴로 웃으며 말씀해주시는 분들에게서 힘을 받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살아왔습니까?”
오에 겐자부로의 <’나의나무’ 아래서>에 있는 문장입니다. ‘나의 나무’가 언젠가 할머니가 된 저에게도 이 질문을 던지겠지요. 저는 가진 것 조금씩 나누며 주변에 친절하게 살아왔노라고 대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샛강 숲에서 저도 조금씩 성숙해지고 있습니다…
#샛숲의 열 가지 정령들
‘재은과 진우가 이끄는 강과 숲에서 배우는 기후투어’가 이번 주 시작되었습니다. 진우 박사님이 기후투어를 안내하며 샛숲의 열 가지 정령들을 꼽아보았습니다.
1. 낭창낭창한 유록색(柳綠色)의 버들잎 (노란빛을 띤 연한 초록색)
2. 오전 숲길에서 느끼는 따뜻한 봄 햇살
3. 사랑꾼 잉어공주 (수달못)
4. 잉어를 노리는 수달 (샛숲 물길의 지배자)
5. 물장난치는 흰뺨검둥오리와 청둥오리 (생태연못, 기후변화 생물지표종)
6. 붉은머리오목눈이 지저귀는 소리 (찔레, 억새, 달뿌리풀)
7. 버들숲을 지키는 박새군단 (기후변화 생물지표종)
8. 앙증맞은 큰개불알풀 (봄까치꽃, Bird eye, 성녀 베로니카, 기후변화 생물지표종)
9. 아낌없이 주는 뽕나무, 신이 내린 보약나무 (뽕나무숲, 그늘마루데크)
10. 샛숲의 애벌레 배추흰나비
4월의 기후투어에 오시면 진우 박사님과 함께 샛숲 정령들을 만나실 수 있어요.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최영미 ‘선운사에서’ 일부)
꽃은 피고 지고 시간이 흐르지만 영영 사라지는 것은 아닐 겁니다.
마음 가득 꽃으로 채우는 날들 되시길 바랍니다.
2021.04.08
햇살과 물결, 그리고 나무가 춤추는 샛강에서
한강조합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