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미씨의 한강편지192_어린이였던 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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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 hangang 등록일23-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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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미씨의 한강편지 192_어린이였던 나에게
지난 토요일 자작자작 비가 내렸습니다.
저는 ‘시가 있는 샛강산책’을 진행하기로 한 터라 아침에 샛강으로 나섰어요. 저와 함께 샛강을 걸으신 분은 단 두 분이었는데 한 분은 작년 여름에 제가 안내하는 샛강산책에 오셨다가 조합원이 되신 정은 선생님, 그리고 다른 한 분은 전날 한강살롱에도 왔던 수정 선생님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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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샛강생태공원 곳곳에 찔레덩굴이 푸르름을 자랑합니다.)  
비가 내내 내리고 있어 우리들은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둘러 앉아 쿠키를 곁들여 커피를 마시며 버드나무에 관한 시를 읽었습니다. 예이츠의 시를 노래로 만든 <Down by the Sally Gardens> 노래도 들었어요. 그렇게 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밖으로 나섰습니다. 옥상에는 은희 선생님이 심어놓은 꽃들이 비에 젖어 생기가 넘쳤어요. 정은 선생님은 화단에 핀 할미꽃을 보고 탄성을 질렀습니다. 앵두 열매는 새끼 손톱처럼 자라고 있었습니다. 재작년 프랑스인들이 심었던 딸기 덩굴이 다시 꽃을 피웠고요. 

참느릅나무와 버드나무, 팽나무 푸른 잎들은 비에 젖어 반질거렸습니다. 찔레 덩굴은 어느새 쑥쑥 자라 가느다랗고 긴 가지를 사방으로 펼치고 있었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 부드러운 찔레순을 따먹던 얘기를 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두런두런 하다 보니 찔레 덩굴 너머로 어린이였던 저의 얼굴이 또렷이 떠올랐습니다. 햇빛에 타 까무잡잡하고 버짐이 핀 작은 아이의 얼굴. 

오늘은 모처럼 날씨가 화창합니다. 점심을 먹고 혼자서 샛강숲을 걸어봅니다. 다시 찔레 덩굴 앞에 멈춰서 오에 겐자부로 씨가 어린이였던 자신에게 받았던 질문을 마찬가지로 던져봅니다. “어떻게 살아왔습니까?” 

만약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난다면, 나는 잘 살아왔노라고 그 아이에게 대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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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회관 옥상에서 막내남동생을 안고 있는 나. 어린이였던 나에게 나는 잘 살아왔는지 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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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제주의 자연에서 배우고 자랐습니다.)  
지난 금요일(4/28) 저녁에는 사회학자 김찬호 교수님을 모시고 한강살롱이 열렸습니다. 강의 주제는 ‘철부지 사회에서 어른이 된다는 것’이었어요. 과연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성찰을 담은 좋은 강의를 해주셨고, 참석자들은 “어른은 OO이다.”라는 문장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저는 “어른은 돌봄이다.”라고 대답했어요. 우선 스스로도 돌볼 줄 알아야 하고, 주위 남들도 돌볼 수 있어야 어른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저 자신도 스무 살이 되면서 혼자 서울살이를 하며 어른이 되었고, 아이를 키웠고 부모님을 섬기는 일을 합니다. 그럴 나이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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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28일 한강살롱 강좌가 열렸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니 제가 돌봐야 할 대상이 늘어가는 것 같습니다. 아이는 다 자라 어른이 되었으니, 더욱 주위에 눈을 돌려 돌봄을 확장해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제가 한강조합에서 하는 일이 그런 돌봄의 연장선이기도 합니다. 주위 사람들에 관심을 갖고 때로 호의를 베푸는 것에 더해서, 이 세상에 함께 살아가는 동식물들도 돌보는 것이죠. 

한강조합에서는 지난 주에도 수많은 자원봉사자들이 오셔서 돌보는 일을 했습니다. 창포원에서 쓰레기와 켜켜이 쌓인 나뭇가지들을 치워내어 산란기의 물고기들을 돌봤습니다. 수달 서식지 부근에서 생태교란종을 관리하고 쓰레기를 치웠으며 울타리를 보수해서 수달들이 편히 쉴 수 있도록 돌봤습니다. 비오톱을 잘 쌓아서 작은 새들과 곤충들이 안전하고 쾌적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돌봤고요. 사철나무를 칭칭 감은 줄기들을 떼어내어 사철나무들이 잘 자라도록 돌봤습니다. 이렇게 한강은 서로 돌보는 공동체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간
작년에 샛숲학교에서 생태 시 읽기 수업도 해주시고 ‘가능주의자’ 북 콘서트도 했던 나희덕 시인님이 20년만에 새 시론집 <문명의 바깥으로> (창비)를 냈습니다. 시인의 4월 28일자 한겨레신문 인터뷰에서 시인은 “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간은 동의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저는 이 말이 생태적인 삶, 생태적인 사회를 만들어가려는 우리들을 칭찬해주시는 말이라고 여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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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시인 시론집 '문명의 바깥으로'가 나왔습니다. c.Yes24)  
샛숲학교에서는 생태적인 삶을 꿈꾸는 한 작가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도 마련했습니다. 3년 전 섬진강에 귀농해서 그곳에서 글을 쓰고 일하며 살아가시는 김탁환 작가님입니다. 생태적인 삶으로, 조화로운 삶을 살며 ‘생태적 인간’이 되고자 하신다면 섬진강 작가를 만나보셔도 좋겠습니다. 

이제 5월이 되었으니 하얀 찔레꽃 피어날 날도 멀지 않았습니다. 
건강하시고 행복한 날들 보내세요. 

샛강숲 찔레덩굴 옆에서 
2023.05.03 
한강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