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숲 속을 걸었습니다. 유월의 숲은 벌써 농익은 여름의 맛과 냄새, 촉감을 지닌 것 같았습니다.
은미씨의 한강편지 355 💌 지다리를 위하여
제주에서 숲 속을 걸었습니다.
유월의 숲은 벌써 농익은 여름의 맛과 냄새, 촉감을 지닌 것 같았습니다. 숲에 들어가는 초입에는 잘 익은 붉은 산딸기 넝쿨이 다가오라고 속삭였습니다.
흐린 날이어서 숲은 습기를 잔뜩 머금고 있었습니다. 앞서 걷던 민언니가 제피나무 잎을 따서 건네줬습니다. 숲에 들어서자마자 제피 향이 풍긴다고 하더니 금새 찾더군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독특한 향이 풍겼습니다. 축축한 숲이어서 그런지 향기는 더 깊이 몸 안으로 감아듭니다. 가까이서 맑고 청아한 새소리가 들립니다. 언니, 저 새 이름 알아요? 물으니 휘파람새라고 대답합니다. 언니는 기분이 좋은지 휘파람새보다 더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숲에는 우리 둘 말고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 부끄럽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작은 별들이 모둠지어 빛나는 듯한 산수국 꽃들이 숲 속으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산수국은 푸르른 숲에 연한 파란 빛깔을 들이고 굵은 나무들과 진갈색 흙은 깊고 안정감 있는 색채로 숲의 그림을 완성합니다. 숲의 얼굴은 너무나 다채롭고 아름다워 자꾸만 바라보고 빠져들게 됩니다. 황홀하기도 하고 신비하기도 하죠. 숲의 들숨과 날숨을 느끼며 그 안에 살아가는 생명들의 기척을 살피죠.
닮은 얼굴의 두 사람, 제주에서.
# 지다리를 위하여
군데군데 흙이 파인 곳이 보였습니다. 작은 동굴도 보이고요. 저건 수달 아니고 지다리야 분명. 민언니가 말했습니다. 제가 맨날 수달 수달 하니 말장난처럼 “수달 아니고 지다리”라고 한 것이죠.
지다리가 뭐더라? 여고 때 지리 선생님 별명이 ‘지다리’였던 것도 떠올랐습니다. 얼굴이 작고 매끈하며 다소 길어보이던 인상이었던 것 같습니다. 언니는 이내 오소리라고 말해줍니다.
어린 시절에 족제비는 한두 번 본 것 같은데 지다리(오소리)를 본 기억은 없습니다. 선생님 별명이 될 정도면 무척 흔한 동물이었을 텐데 말이죠. 며칠 전에 본 영화에서도 오소리가 나왔습니다. 영화 나레이터이자 감독인 남자가 동네 숲을 탐색하기 시작하는데 오소리 가족이 사는 걸 발견하게 되죠. 그는 몇 달 동안 잠복하다시피 기다려 직접 두 눈으로 오소리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뱅상 베르자 감독의 유튜브 채널 <Partager C'est Sympa> 영상 속 오소리.
# 생명은 스스로를 지킬까?
올해 서울국제환경영화제는 공동체상영으로 영화를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좋은 기회인지라 우리 한강조합도 다큐 영화를 한 편 신청했습니다. <생명은 스스로를 지킨다 The Wild Defending Itself>라는 영화였습니다. 영화소개는 이렇습니다.
환경영화제 공동체 상영 오프닝 중. ⓒ이정민
환경 운동의 현장을 10년간 기록해온 유튜버 뱅상 베르자의 다큐멘터리입니다. 프랑스 곳곳에서 벌어지는 야생동물 서식지 파괴와 그에 맞선 투쟁들, 고원의 숲, 오소리 굴, 대형 물 저장 시설, 고속도로 건설 반대 운동까지, 생명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여정을 개인적이고 섬세한 시선으로 담아냈습니다. (서울국제환경영화제의 소개 글)
영화는 대단히 좋았습니다. 여러 가지 현장과 야생의 자연을 보여주는데 역동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무엇보다 야생 생명을 만나면서 사람들이 변화하는 과정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음악도 편집도 관통하는 주제도 다 좋았어요. 상영회를 준비한 고은은 별 다섯 개를 줬어요)
영화를 보는 동안 여러 생각이 들었습니다. 프랑스 사람들의 과격하고 집요한 시위에는 놀라기도 하고, 최루탄을 쏘며 밀어붙이는 경찰에는 분개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도심 곁의 작은 숲이나 공터에서 살아가는 야생동물을 발견하는 건 경이롭고 아름다웠습니다. 인간의 개발이나 파괴 때문에 하루 아침에 서식지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면 프랑스나 한국이나 다를 바 없다는 생각도 들었죠.
<생명은 스스로를 지킨다> 영화 속 A69 고속도로 건설 반대 집회 현장.
10년간 현장을 기록하고 그 자신 역시 생명의 옹호자가 되며 뱅상은 때로는 열성적이고 때로는 흔들리고, 때로는 감탄하고 때로는 회의감과 걱정에 빠집니다. 그러나 끝내 생명의 편에서 연대하기를 포기하지 않죠. 그렇게 승리를 거머쥡니다. 물론 그런 승리가 영원하지는 않다는 것도 잘 알지요.
# 연대하고 협력하다
이 세상 어디나 서로 연대하고 돕는 일, 그것만큼 값진 일이 없는 것 같습니다. 영화를 보며 새삼 마음을 다잡게 되더군요. 자연 속 생명들과 연대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존재를 파악하고 알아채는 게 먼저겠지요.
그동안 중랑천 강 안내자 과정에 참여한 그린 그리너들이 오늘은 중랑천 현장으로 나갔습니다. 사운드스케이프협회 대표를 맡고 있는 손종례 작가의 안내로 중랑천의 소리를 수집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합니다. 강물 가까이 그리고 허공 속으로 마이크를 대고 그들은 어떤 생명의 이야기를 들었을까요? 그곳에서 살아가는 어떤 생명들을 새로이 알아채게 되었을까요?
하늘과 물, 잎과 생명의 소리를 듣는 시간. ⓒ박미경
지방선거 이후 우리 한강조합은 ‘한강의 길’을 점검하고 새로운 모색도 해보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근사한 상상과 아이디어가 나오기도 합니다. 어떤 일들을 얼마나 더 새로이 할 수 있을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요. 그 모든 한강의 일에 기본은 변함이 없다고 생각해요. 그건 연대하고 협력하는 일이죠.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작은 생명들 곁에서 연대하는 일
지역의 자연과 공동체를 지켜내려는 사람들과 협력하는 일
지금까지도 한강은 그런 일을 했고, 앞으로도 꾸준히 그런 일을 할 거예요.
그런 한강의 길을 같이 걸어 주셨으면 해요. 그토록 생기 넘치고 향기롭고 서늘한 유월의 숲 속으로 같이 걸어가듯이…
은미씨의 한강편지 355 💌 지다리를 위하여
제주에서 숲 속을 걸었습니다.
유월의 숲은 벌써 농익은 여름의 맛과 냄새, 촉감을 지닌 것 같았습니다. 숲에 들어가는 초입에는 잘 익은 붉은 산딸기 넝쿨이 다가오라고 속삭였습니다.
흐린 날이어서 숲은 습기를 잔뜩 머금고 있었습니다. 앞서 걷던 민언니가 제피나무 잎을 따서 건네줬습니다. 숲에 들어서자마자 제피 향이 풍긴다고 하더니 금새 찾더군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독특한 향이 풍겼습니다. 축축한 숲이어서 그런지 향기는 더 깊이 몸 안으로 감아듭니다. 가까이서 맑고 청아한 새소리가 들립니다. 언니, 저 새 이름 알아요? 물으니 휘파람새라고 대답합니다. 언니는 기분이 좋은지 휘파람새보다 더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숲에는 우리 둘 말고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 부끄럽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작은 별들이 모둠지어 빛나는 듯한 산수국 꽃들이 숲 속으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산수국은 푸르른 숲에 연한 파란 빛깔을 들이고 굵은 나무들과 진갈색 흙은 깊고 안정감 있는 색채로 숲의 그림을 완성합니다. 숲의 얼굴은 너무나 다채롭고 아름다워 자꾸만 바라보고 빠져들게 됩니다. 황홀하기도 하고 신비하기도 하죠. 숲의 들숨과 날숨을 느끼며 그 안에 살아가는 생명들의 기척을 살피죠.
# 지다리를 위하여
군데군데 흙이 파인 곳이 보였습니다. 작은 동굴도 보이고요. 저건 수달 아니고 지다리야 분명. 민언니가 말했습니다. 제가 맨날 수달 수달 하니 말장난처럼 “수달 아니고 지다리”라고 한 것이죠.
지다리가 뭐더라? 여고 때 지리 선생님 별명이 ‘지다리’였던 것도 떠올랐습니다. 얼굴이 작고 매끈하며 다소 길어보이던 인상이었던 것 같습니다. 언니는 이내 오소리라고 말해줍니다.
어린 시절에 족제비는 한두 번 본 것 같은데 지다리(오소리)를 본 기억은 없습니다. 선생님 별명이 될 정도면 무척 흔한 동물이었을 텐데 말이죠. 며칠 전에 본 영화에서도 오소리가 나왔습니다. 영화 나레이터이자 감독인 남자가 동네 숲을 탐색하기 시작하는데 오소리 가족이 사는 걸 발견하게 되죠. 그는 몇 달 동안 잠복하다시피 기다려 직접 두 눈으로 오소리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 생명은 스스로를 지킬까?
올해 서울국제환경영화제는 공동체상영으로 영화를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좋은 기회인지라 우리 한강조합도 다큐 영화를 한 편 신청했습니다. <생명은 스스로를 지킨다 The Wild Defending Itself>라는 영화였습니다. 영화소개는 이렇습니다.
환경 운동의 현장을 10년간 기록해온 유튜버 뱅상 베르자의 다큐멘터리입니다. 프랑스 곳곳에서 벌어지는 야생동물 서식지 파괴와 그에 맞선 투쟁들, 고원의 숲, 오소리 굴, 대형 물 저장 시설, 고속도로 건설 반대 운동까지, 생명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여정을 개인적이고 섬세한 시선으로 담아냈습니다. (서울국제환경영화제의 소개 글)
영화는 대단히 좋았습니다. 여러 가지 현장과 야생의 자연을 보여주는데 역동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무엇보다 야생 생명을 만나면서 사람들이 변화하는 과정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음악도 편집도 관통하는 주제도 다 좋았어요. 상영회를 준비한 고은은 별 다섯 개를 줬어요)
영화를 보는 동안 여러 생각이 들었습니다. 프랑스 사람들의 과격하고 집요한 시위에는 놀라기도 하고, 최루탄을 쏘며 밀어붙이는 경찰에는 분개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도심 곁의 작은 숲이나 공터에서 살아가는 야생동물을 발견하는 건 경이롭고 아름다웠습니다. 인간의 개발이나 파괴 때문에 하루 아침에 서식지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면 프랑스나 한국이나 다를 바 없다는 생각도 들었죠.
10년간 현장을 기록하고 그 자신 역시 생명의 옹호자가 되며 뱅상은 때로는 열성적이고 때로는 흔들리고, 때로는 감탄하고 때로는 회의감과 걱정에 빠집니다. 그러나 끝내 생명의 편에서 연대하기를 포기하지 않죠. 그렇게 승리를 거머쥡니다. 물론 그런 승리가 영원하지는 않다는 것도 잘 알지요.
# 연대하고 협력하다
이 세상 어디나 서로 연대하고 돕는 일, 그것만큼 값진 일이 없는 것 같습니다. 영화를 보며 새삼 마음을 다잡게 되더군요. 자연 속 생명들과 연대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존재를 파악하고 알아채는 게 먼저겠지요.
그동안 중랑천 강 안내자 과정에 참여한 그린 그리너들이 오늘은 중랑천 현장으로 나갔습니다. 사운드스케이프협회 대표를 맡고 있는 손종례 작가의 안내로 중랑천의 소리를 수집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합니다. 강물 가까이 그리고 허공 속으로 마이크를 대고 그들은 어떤 생명의 이야기를 들었을까요? 그곳에서 살아가는 어떤 생명들을 새로이 알아채게 되었을까요?
지방선거 이후 우리 한강조합은 ‘한강의 길’을 점검하고 새로운 모색도 해보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근사한 상상과 아이디어가 나오기도 합니다. 어떤 일들을 얼마나 더 새로이 할 수 있을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요. 그 모든 한강의 일에 기본은 변함이 없다고 생각해요. 그건 연대하고 협력하는 일이죠.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작은 생명들 곁에서 연대하는 일
지역의 자연과 공동체를 지켜내려는 사람들과 협력하는 일
지금까지도 한강은 그런 일을 했고, 앞으로도 꾸준히 그런 일을 할 거예요.
그런 한강의 길을 같이 걸어 주셨으면 해요. 그토록 생기 넘치고 향기롭고 서늘한 유월의 숲 속으로 같이 걸어가듯이…
푸르른 산수국의 인사를 전하며
2026.06.18
한강 드림
사회적협동조합 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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