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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미씨의 한강편지 367 💌 나는 제주 풀벌레

2026-09-18
조회수 109
가만히 눈을 감아보세요. 주위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세요. 풀벌레 소리가 들리지요? 어떤 소리가 들리나요?

은미씨의 한강편지 367 💌 나는 제주 풀벌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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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경모

가만히 눈을 감아보세요. 

주위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세요. 풀벌레 소리가 들리지요? 어떤 소리가 들리나요? 배음처럼 들리는 소리는 청솔귀뚜라미랍니다. 이맘때면 전국 어디서나 들으실 수 있어요. 오른쪽 방향에서 들리는 뚜렷하고 높은 소리가 들리나요? 그건 폭날개긴꼬리랍니다. 샴귀뚜리미, 왕귀뚜라미 소리도 중간중간에 들리고 있어요. 

이제 길을 따라 이쪽으로 가볼게요. 어두우니 발 아래를 조심하세요. 목소리는 낮추고 조용히 걸어갈게요. 불빛은 필요없어요. 걷다 보면 어둠도 익숙해지죠. 자, 여기서 멈춰볼까요. 멈추고, 가만히 눈을 감아보세요. 

이번에는 풀벌레 소리에 집중하며 미세한 파동 같은 게 느껴지나 보세요. 가만히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그것이 어느새 우리 몸으로 진동처럼 흘러 들어오기도 하죠. 어떤가요? 

# 나는 풀벌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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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화

어느 날 나는 염소가 되어 철둑길 차단기 기둥에 매여 있었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는 염소가 될 이유가 없었으므로, 염소가 된 꿈을 꾸고 있을 뿐이라 생각했으나, 한없이 고요한 내 발굽, 내 작은 뿔, 저물어가는 여름 하늘 아래, 내 검은 다리, 내 검은 눈, 나의 생각은 아무래도 염소적인 것이어서, 엄마, 쓸쓸한 내 목소리, 

(서대경 시 <차단기 기둥 곁에서> 부분 인용) 

삶이란 가끔 기이하고 신비롭죠. 위 시처럼 어느 날 나는 염소가 될 수도 있고, 그레고르 잠자처럼 벌레가 될 수도 있죠. 그리스 신화를 보면 변신 이야기가 넘쳐나죠. 이처럼 문학작품이나 신화를 접하면서 저는 변신에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종종 아득한 마음에 젖어 나는 어떤 존재로 변신하게 될까, 상상에 빠지기도 해요. 

지난 주에 제주 탐나라공화국에 갔어요. 하루의 노동을 마치고 우리는 춤을 추고 노래를 들으며 놀았죠. 그리고 나서 찾아온 밤의 시간. 양경모 대표님이 풀벌레들의 소리풍경으로 안내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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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화

가만히 눈을 감고 청솔귀뚜라미를 비롯한 무수한 풀벌레들의 합창을 들었어요. 그리고 소리가 파동이 되어 나에게 올 때 나는 분명 풀벌레와 하나가 되었죠. 풀벌레는 내 안에서 한참을 노래했어요. 

# 나는 강이다. 

그제 화요일 밤에는 <나는 강이다> 영화를 보았어요. 영어 원제는 ‘I am the river, the river is me’라고 해요. 즉, 나는 강이고, 강은 곧 나다. 그런 의미죠. 세계 최초로 법인격을 부여받은 강인 뉴질랜드 북섬 황아누이강이 영화의 주인공이고 그곳에 사는 주민들과 연대하는 세계시민들이 나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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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나는 강이다> 中

나는 강이고, 강이 나라는 고백은 자연과 나의 하나됨을 말하죠. 제주도에서 내가 그 밤에 잠시 풀벌레가 되었듯이… 내가 바로 강이니, 나를 돌보듯이 강을 돌봐야 하고, 내가 행복하고 건강한 삶을 살아야 하듯이, 강도 그래야 하는 거죠. 

영화에서 서로 돌아가며 자기 소개를 하던 장면도 기억나요. 저는 어느 강이 있는 어느 나라 어느 지역에서 왔습니다, 이런 식으로 소개하더군요. 저는 살면서 한 번도 그런 식으로 소개한 적은 없는데 따라해보고 싶었어요. 

저는 아홉 군데 연못이 있어 ‘물이 샘솟는 마을’이라는 뜻을 가진 제주도 낙천리에서 태어났어요. 저는 그 물에서 놀며 자랐고, 물뱀을 구경했으며, 연꽃과 개구리밥이 자라는 걸 보았죠. 또 그보다 더 오래 전에는 우리 어머니와 할머니가 웃뜨르 새못에서 물을 길어와 밥을 짓고 우리를 키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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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뚜라미의 시간 

여름 한철 매미 소리가 세상을 가득 채우더니 이제는 풀벌레 소리가 가을 밤을 채웁니다. 저마다 자신이 터잡은 땅에서 생명의 노래를, 그치지 않고 부르는 걸 보면 경이롭습니다. 작은 풀벌레로부터 우리는 삶의 신성함과 진지함을 배우죠. 

나희덕 시인님의 시 <귀뚜라미>로 편지를 마치려고 해요. 아마 그는 어느 여름날 도시 지라도 콘크리트 좁은 틈에서 숨막힐 듯 울어대는 귀뚜라미 소리를 들었는가 봅니다. 그리고는 그 귀뚜라미 처지가 당시 당신의 고단함과 닮았다고 생각했을까요. 언젠가 말씀을 해주셨는데 기억은 정확하지 않군요. 

맹렬히 때로 청아하게 울어대는 풀벌레 소리에 마음 기울이며, 

이 가을 평안하시길 바랄게요. 

귀뚜르르 뚜르르 인사를 전합니다. 

2026.09.18

한강 드림 

귀뚜라미 _나희덕 

 

높은 가지를 흔드는 매미소리에 묻혀

내 울음 아직은 노래 아니다


차가운 바닥 위에 토하는 울음,

풀잎 없고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지하도 콘크리트 좁은 틈에서

숨막힐 듯, 그러나 나 여기 살아 있다

귀뚜르르 뚜르르 보내는 타전소리가

누구의 마음 하나 울릴 수 있을까 


지금은 매미떼가 하늘을 찌르는 시절

그 소리 걷히고 맑은 가을이 

어린 풀숲 위에 내려와 뒤척이기도 하고

계단을 타고 이 땅밑까지 내려오는 날

발길에 눌려 우는 내 울음도

누군가의 가슴에 실려가는 노래일 수 있을까 


프로그램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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