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미씨의 한강편지240_내 이름은 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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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 hangang 등록일24-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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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미씨의 한강편지 240_내 이름은 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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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샛강생태공원의 사월 C.이영원)

#내 이름은 사월
나는 제주도의 노란 유채밭과 푸른 보리밭 사이에 있습니다. 나는 거문오름의 삼나무와 붉은오름의 검붉은 흙 사이에도 있습니다. 눈물 지으며 떠밀려오는 파란 바다와 등지고 돌아선 섬들 사이에도 있습니다. 내 이름은 사월입니다. 

오래 전에 나는 나의 땅이 검붉은 피로 물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기억은 여전히 나를 슬픔에 젖게 합니다. 보리밭에서 곶자왈에서 관덕정에서 너븐숭이에서 아이들과 여자들과 청년들과 노인들이 맥없이 쓰러지던 것을, 나는 보았습니다. 죽창의 뽀족함과 총의 날카로움이 나의 공기를 갈랐습니다. 두려워하며 나는 바다에게, 숲에게 어서 저 날카로운 것들을 덮어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말이 없는 시체들은 바다로 땅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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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평화공원에서 추모하다 C.조은덕)

내 이름은 사월, 나는 혁명입니다. 나는 1960년 민주주의를 열망하며 거리에서 외치던 학생들의 곁에 있었습니다. 어린 학생들이 피를 흘리고 끌려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째서 자유에는 /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 혁명(革命)은 / 왜 고독한 것인가를 
(김수영 ‘푸른 하늘을’ 부분) 

한편 나는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 추억과 욕정이 뒤섞고 /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웁니다. (T.S. 엘리엇 ‘황무지’ 부분)’ 봄비만이 아닙니다. 햇살과 바람과 빗줄기로 나는 나무들에게 꽃들에게 흙에게 어서 생명의 일을 하라고 다독입니다. 나무와 꽃과 새들은 나를 다정하다고 생각합니다. 새들은 사랑을 나누고 가까이 선 나무들은 가지를 벌려 맞잡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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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샛강생태공원 연두 버드나무 숲 C. 이영원)

#내 이름은 연두
겨울 동안 긴긴 잠에서 꿈을 꾸었습니다. 얼어붙는 땅 아래에서 숨을 죽이며 추억을 더듬었습니다. 가뭇없이 흘러가는 샛강 강물처럼, 작년의 나는 사라졌고 더 이상 올해의 내가 아닙니다. 내 이름은 연두. 나는 젊음과 사랑과 추억의 총체입니다. 

나는 여의샛강생태공원 숲에 머물고 있습니다. 나는 서두르지 않으며 사월의 시간 속에서 서서히 나를 드러냅니다. 갯버들 가지 끝에서 버드나무 줄기에서 찔레 덩굴에서 강둑에 가라는 풀들에서, 나는 머물고 있습니다. 

여섯 살 여자아이와 아버지가 숲으로 내려옵니다. 성모병원에 오래 머물고 있는 아이입니다. 아버지는 벚꽃을 따서 아이의 모자에 꽂아주었습니다. 아이는 가만히 앉아 나를 바라봅니다. 아빠, 나무와 숲이 온통 연두빛이네. 아이는 나를 알아챕니다. 나는 아이가 건강해져서 더 이상 나를 보러 오지 않아도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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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부러진 버드나무의 삶 C.이영원)

#내 이름은 버들
나는 사월과 연두의 친구 버드나무입니다. 사월과 연두가 있어, 사람들은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아름답다고 칭찬합니다. 나를 멀리서 보면 얼핏 연두가 그린 그림이 보이고, 가까이서 보면 사월의 노래가 들립니다. 

나는 여느 나무들이 그렇듯이 새들과 벌레들을 먹이고 키웁니다. 박새들이 보답하듯이 노래를 불러줘서 나도 행복합니다. 그러나 나는 행복보다는 슬픔의 편에 좀더 가까이 서 있습니다. 

봄날 가운데 서성이며 돌아가신 부모님이나 떠나간 연인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나를 바라봅니다. 점심이 마땅치 않아 편의점에서 사온 주먹밥 하나를 우물거리며 삼키는 노인이 외로움을 나에게 맡깁니다. 원하는 일이 계속 잘 되지 않아 실의에 잠긴 청년이 나의 부러진 등성이를 만져봅니다. 자주 부러지고 넘어지지만 굴하지 않고 새로운 가지를 내는 나는 슬픔의 친구가 되어 줍니다. 

어느 순간 벚꽃이 피어나 세상이 온통 환합니다. 사월과 연두, 버드나무와 벚꽃이 있는 날들, 자연 곁에서 행복하시길 기원합니다.   
2024.04.04
한강 드림
(이번 편지는 오르한 파묵의 소설 <내 이름은 빨강>에서 착안하여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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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버들 C.이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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