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경동과 송경용
송경동은 1967년 전라남도 벌교에서 태어났습니다. 가난한 집에서 자란 그는 아버지에게 2만원을 빌려 달라고 부탁하여 서울로 옵니다. 노동자로 일하며 구로노동자문학회에서 시를 씁니다. 2001년 [실천문학]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꿀잠] [사소한 물음들에 대해 답함]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 그리고 올해 [꿈꾸는 소리 하고 자빠졌네] 여러 권의 시집과 산문집을 냅니다.
송경동은 노동자였고 거리의 시인입니다. 용산참사, 한진중공업 희망버스, 세월호 진상규명 등 모든 현장에 그는 있었고 한데서 찬바람을 같이 맞았던 사람입니다. 그가 시인이 된 것은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의 칭찬 한 마디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시 쓰기 숙제를 냈는데, 선생님이 그를 호명하고 그의 시를 읽어보라고 한 것입니다. 그전까지는 선생님이 이름을 부르면 혼나는 일만 있어서 긴장하고 진땀이 났습니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선생님의 칭찬 덕에 시쓰기에 호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송경용은 1960년 전라북도 전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어려운 집안 형편을 돕기 위해 부모님이 먼저 와 계시던 서울로 상경했습니다.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14가지 일을 동시에 하며 입시 준비를 했습니다. 돈을 잘 벌 수 있으리란 생각에 대학 건축학과에 입학했지만, 선배의 권유로 야학 운동을 하게 됩니다. 이후 그는 상계동, 봉천동에서 야학을 하고 철거민 투쟁에 함께 하며 가난한 노동자들과 깊은 인연을 맺었습니다.
송경용은 성공회 신부로서 2001년부터 ‘걷는 교회’를 하고 있습니다. 예배당 건물이 아니라 어디라도 성소라고 여기고 세월호 광장에서, 해고 노동자 농성장에서, 여러 집회 현장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라고 하며 자랑스러워 합니다. 사회적 경제 분야의 대가이기도 한 그는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안전망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쉬지 않습니다.
송경동과 송경용은 이름이 비슷해서 형제 아니냐는 질문을 곧잘 받습니다. 어떤 이들은 송경동에게 전화해서 송경용의 안부를 묻고, 또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피를 나눈 형제는 아니지만 의형제로 지내기로 했습니다. 지난 금요일 (7월 15일) 저녁 샛강에서는 송경동 시인 북 콘서트가 열렸습니다. 그러자 그의 형님인 송경용 신부가 축하 공연을 하려고 달려왔습니다.
저는 송경동 시인과 송경용 신부를 보면 ‘함께 비를 맞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프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곁을 지켜주고 연대의 손길을 내미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왜 샛강에 왔을까요?
제가 바라는 샛강은 만남과 배움, 위로와 치유의 공동체입니다. 지난 북 콘서트를 통해서 사람들은 송경동 시인의 시 세계를 만나고, 그의 시를 통해 우리 사회를 읽고 배웁니다. 유머와 시적 아름다움이 담긴 시를 통해 위로받고, 함께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 용기를 얻습니다. 거기에 더해 생기가 넘치는 샛강 숲은 우리들 마음 깊숙이 초록 물을 들여줍니다.
북 콘서트에는 많은 분들이 오셔서 시낭송과 시인의 이야기, 그리고 이어지는 노래를 들었습니다. 여름 저녁의 더위도 조용히 물러나고 바람에 실리는 시와 노래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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