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상흔은 치유된다. 그러나 완전히 치유되는 것은 아니다. 뿌리 뽑힌 나무들은 다시 뿌리를 내리지 못하였고, 갈라진 언덕들에는 상흔이 남아 있다. 새로이 자라난 나무들은 결코 그 옛날의 나무가 아니며, 언덕을 뒤덮은 무성한 풀 아래에는 갈라졌던 과거의 흔적이 남아 있다. 과거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완전한 복구란 있을 수 없다.
(조지 엘리엇 ‘플로스 강의 물방앗간’ 에필로그 중에서)
한강 선생님들께,
비 피해는 없으신지요?
정말 많은 비가 내렸습니다. 저희도 물의 난포함을 고스란히 느낀 한 주였습니다.
기후재난이 아니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 기록적인 폭우로 인해 우리 사회의 저지대에 계신 분들이 먼저 피해를 입었습니다. 저도 젊은 시절 반지하에 살았던 경험이 있는 터라 남의 일 같지 않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언제나 곰팡이와 습기가 좁은 방안을 좀먹던 반지하방.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영화는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지만,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의 현실은 여전하네요.
샛강에 있다 보면 시시각각으로 물이 차오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희는 매시간 단위로 안내 방송을 한다거나 안전 조치를 사전에 취하기 위해 폭우 속에서도 바쁘게 움직여야 했어요.
샛강문화다리 위에 서서 보면 평소에 느릿하게 거니는 아늑한 산책로나 길섶으로 곱게 피어난 쑥부쟁이 꽃들이 간 곳 없습니다. 황토 빛 물이 숲을 서서히 삼켜 나무들만 팔을 힘겹게 들고 버티고 선 듯합니다.
19세기 영국 소설가 조지 엘리엇이 썼듯이 홍수가 지나가고 나무들이 새로이 자라지만 그 나무들은 예전 그대로가 아니지요. 올 여름 샛강만 해도 서너 차례 큰물에 잠겼습니다. 그 탓에 굵은 버드나무 몇 그루 힘없이 쓰러지고 잘려 나갔습니다. 그 자리에 새로이 나무들이 자라겠지만 샛강에서 오랜 세월 함께 살아온 나무들이 홍수에 쓸려 무너지는 모습이 괜히 마음이 서걱거립니다.
완전한 복구란 없을지라도, 할 수 있는 것들은 해야 합니다. 묵묵히, 담담히. 자연이 하는 일에 항의할 수는 없으니까요. 인간이 자연에 하는 일에 항의하면 모를까. 지난 주말에도 버드나무 교실에 자원봉사자들이 많이 오셨습니다. 그들의 힘을 빌어 홍수가 휩쓸고 지난 자리 자연의 상흔을 부지런히 치유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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