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A에게,
어제는 눈이 제법 내렸습니다.
가는 눈송이로 날리던 눈이 점점 굵어지며 함박눈이 되었습니다. 샛강센터 발코니 문을 여니 찬 공기와 함께 눈송이가 온몸에 내려앉습니다. 저는 이런 날 다같이 사진 한 장 찍자고 직원들을 불러냈어요. 마침 샛강에 사진수업을 왔던 백은희 선생님이 우리들을 흑백 사진으로 담아주었습니다.
당신을 만나지 못하고 이렇게 한 해가 저물어 갑니다. 코로나 이전에는 당신과 꽤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 말입니다. 우리는 광화문 씨네큐브 같은 영화관에서 한적한 시간에 영화를 보고 덕수궁 돌담길을 걷곤 했어요. 좋은 영화를 보고 나면 정동길에 있는 맥주집에서 우리는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우리가 걷던 정동길의 봄과 여름, 가을과 겨울은 언제나 정겹고 아늑했어요. 그건 아마 같은 세상을 살아가고, 비슷한 마음으로 사람들에 대해 연민을 품은 당신이 곁에 있어 그랬을 겁니다.
올해 봄부터 우리는 서로 곧 보자고 종종 카톡을 나누었어요. 벚꽃 피면 샛강에 걸으러 갈게요. 당신은 그렇게 말했지만 벚꽃이 한참 피었다 지도록 오지 못했어요. 버드나무 숲이 연두에서 진초록으로 변하는 과정을 당신에게 사진으로 보냈지요. 당신은 버드나무 아래서 같이 시를 읽고 싶다고 했죠. 여름에는 샛강에 홍수가 몇 번 났고, 당신은 물이 할퀴고 간 숲의 나무들을 걱정해줬어요. 손을 보태지 못해 미안하다면서 언제 짬을 내서 자원봉사라도 해야겠다고 말했죠.
지난 여름 우리는 만나기로 했죠. 깐느에서 상을 받은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이 개봉되자 이 영화는 꼭 같이 보자고 했어요. 당신을 만나기로 한 날 저는 일찌감치 집을 나섰어요. 미리 영화표를 두 장 사고 정동길로 걸어 나와 프란치스꼬 회관 근처 카페에서 카푸치노도 한 잔 마셨어요. 그런데 당신은 오지 못했죠. 전날 큰 비가 왔고 으슬으슬 감기 기운이 있던 당신은 혹시 싶어 코로나 자가키트로 검사를 했어요. 그 결과 양성반응이 나왔어요.
혼자서 <헤어질 결심>을 보고 나오면서 당신이 그리웠고 또 많이 아프면 어쩌나 걱정했습니다. 쓰지 못한 당신의 영화표는 읽고 있던 책 사이에 끼워 두었습니다. 나중에 만나면 책과 함께 당신에게 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어제는 퇴근하는데 영하의 날씨가 꽤 추웠습니다. 이렇게 한겨울이 시작되는구나 싶고 당신을 한 번도 만나지 못하고 해를 넘기는 것이 아쉬웠습니다. 그래서 버스 정류장에서 당신에게 전화한 거예요. 우리 만나자고, 같이 영화도 보고 밥도 먹자고요. 영화는 어떤 거라도 무방하다고. 팝콘을 먹으며 귀엣말을 나누며 봐도 좋겠죠.
당신은 그러자고 했어요. 우리는 27일로 약속을 정했어요. 춥고 어둑한 버스 정류장에서 서성이는데 저만치 앞에서 제가 기다리는 버스가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환한 불빛을 달고 다가오는 버스는 당신의 우정처럼 포근했고 저는 추위를 잠시 잊었습니다.
건강한 모습으로 곧 만나요. 기다릴게요.
2022.12.14 은미 드림
(한 해를 마무리하며 저희 한강조합에서 영화상영회와 송년 파티를 준비했어요. 한강 선생님들을 만나고 싶어서요. 가상의 A는 바로 이 편지를 읽어주시는 선생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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