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개나리가 피었네. 우리 소풍가도 되겠다.”
상쾌한 기분으로 출근하는 아침, 뒤에서 들려오는 젊은 엄마의 목소리가 있습니다. 힐끔 돌아보니 옆에는 어린이집 가방을 맨 여자 아이가 엄마 손을 잡고 걷고 있었죠.
저는 순간적으로 말을 걸까 말까 갈등했어요. 아파트 입구에는 낮은 벽을 따라 길게 늘어선 영춘화가 예쁘게 노란 꽃을 피우고 있거든요.
“저기 어머님, 저게 개나리가 아니고요. 영춘화라는 꽃이거든요. 이른 봄에 피어 봄을 환영한다는 뜻으로 지어진 이름이죠. 자세히 보면 개나리랑 좀 달라요.”
발걸음마저 늦추며 몇 초 고민하다가 그냥 가던 길을 갔습니다. 그게 개나리든 영춘화든 그 순간 엄마와 아이에겐 중요한 것도 아니죠. 어쩌면 엄마랑 떨어지기 싫고 어린이집 나가기 싫은 마음이 있는 아이에게 엄마가 봄소풍에 대한 희망으로 달래는 것일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제가 불쑥 끼어들어 꽃 이름 바로잡아 준다고 잘난 체하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짓일까요. (가던 길 조용히 가길 잘했지요. ^^)
#스물 다섯, 스물 하나
요즘 인기 많은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를 저도 보고 있습니다. 20대 조카랑 살다 보니 좋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지난 주에는 고양이 번역기 앱을 깔았고, 이번 주에는 이렇게 잘나가는 드라마도 알게 되었어요.
드라마 속 주인공들이 97년 IMF를 전후로 십대에서 이십대로 넘어가며 겪는 성장통과 꿈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저 역시 90년대 20대를 보낸 터라 무척 공감하게 되더군요. IMF라는 우리 사회에 큰 타격을 주었던 경제위기에 대해 생생하게 그렸고, 학교와 직장에서 사람들이 흔히 겪었을 법한 일들을 잘 보여주고 있어요.
드라마를 보며 문득 저의 스물 다섯, 스물 하나 시절에 대해서도 회상해보았습니다. 스물 하나 때는 서울 생활이 여전히 익숙지 않은 촌뜨기라 상처도 많이 받고 힘들었지요. 무엇보다 쉴 만한 나무 그늘 넉넉하지 않고 황막한 도시 단칸방에서의 생활이 마음을 메마르게 했어요.
스물 다섯 때는 제가 환경 단체인 환경운동연합에서 회원가입을 하고 자원봉사를 시작하던 시기입니다. 환경오염으로부터 자연을 지키는 것이 제가 제주도 자연에게서 받은 은혜를 갚은 길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당시는 궁핍함을 벗지 못하면서도 5천원 후원금을 다달이 내기도 했어요. 스물 다섯 즈음에 환경단체 자원봉사자였던 저는 쉰 살이 되어 환경 분야 사회적협동조합의 이사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스물 다섯 때는 제가 지금 이 자리에서 이 일을 할 거라곤 짐작조차 못했어요. 그런데 마치 작은 물줄기가 흐르고 흘러 큰 강으로 나아가듯이, 환경에 대한 관심과 애정으로 이렇게 ‘한강’에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요즘 샛강생태공원에는 스물 다섯, 스물 하나 나이의 자원봉사자들이 참 많습니다. 한 주 동안 100명 이상의 자원봉사자들이 와서 일을 하고 갑니다. 누구는 학생이라 봉사 시간이 필요해서, 누구는 직장에서 환경봉사를 권장해서 오기도 합니다. 그리고 또 누구는 그냥 봉사가 좋아서, 샛강의 생태환경을 가꾸는 일이 기뻐서 오기도 하고요.
꼭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저의 과거 자원봉사 경험에 비춰보아도) 이곳 샛강에서의 봉사활동은 만만치 않습니다. 일을 제대로 시킨다는 뜻입니다. ^^ 비대면 줍깅 같은 활동은 그나마 자율적으로 돌아다니니 수월한 편인데, 버드나무 교실의 숲 가꾸기 봉사는 꽤 땀을 흘려야 해요. 나무를 심을 구덩이를 파거나, 돌이나 흙을 나르거나, 굵은 나무토막을 옮기고 덩굴을 제거합니다.
매일같이 샛강에 찾아오는 자원봉사자들을 보면 고맙기도 하면서 그들이 무한한 가능성과 미래에 대해 상상해봅니다. 그들 중 누군가는 저처럼 나중에 환경 관련 직업을 가질 수도 있고, 연구자나 후원자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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