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황지우 시 일부)
한강 선생님들께,
설 연휴를 앞두고 편지를 씁니다.
이번 연휴는 유독 조용한 명절이 될 것 같지요. 시끌벅적 모임이 아쉽기도 하지만, 한편 의당 해야 하는 명절의 의무와 감정노동에서 벗어나는 것도 홀가분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연휴 동안 날씨도 춥지 않다고 하니 산책과 휴식, 독서로 편안하게 쉬시고 충전하는 시간이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정오 나절에 샛강에 또 손님들이 오셨습니다. 50플러스재단에서 교육을 담당하시는 분들인데, 샛강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의논하는 자리였습니다. 간소한 점심을 먹고 샛강 숲을 잠시 걸었습니다. 언 땅이 녹아 진흙이 구두에 많이 붙어 가장자리를 골라 천천히 걸었지요. 샛숲길 무릉도원을 지나 달뿌리풀 평원을 바라본 다음 수달못으로 다가갔습니다.
수달못이라고 이름지은 것은 겨우 한두 달 전, 그런데 어쩌면 수달이 이 곳에 곧 살러 올 수도 있겠다 하는 희망을 가져봅니다. 그래서 오늘은 유팀장님이 ‘달수네 집 가준공’을 했습니다. 물이 자작자작 낮게 흐르는 수달못과 샛강 사이, 갈대 푹신한 곳에 은신처를 만들었고, 종종 물고기도 공급할 계획입니다. 그러니까 안락한 집에, 식사제공까지! 서울, 아니 전국 어디에 이만한 집 분양이 있을까요? 게다가 사람들이 원하는 아파트 분양가나 집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아 비싸지만, 저희가 만든 달수네 집은 무료 분양입니다. ^^
달수네는 청약저축도, 허리띠 졸라매는 대출도 필요없습니다. 그저 와서 건강하게 살기만 하면 됩니다. 돌아오며 오랜만에 황지우 시 <너를 기다리는 동안>이 떠올랐습니다.
이 시는 교과서에도 실린 걸로 압니다. 교과서에 실린 ‘시험출제용’ 시들이 그러하듯이, 이 시를 배우는 학생들은 이 시에서 말하는 ‘너’는 과연 누구냐, 하는 문제를 내고 정답을 찾게 하지요. ^^
정답으로 흔히 제시하는 ‘너’는 민주주의입니다만, 시를 소리내어 읽다 보면 ‘너’는 사랑하고 보고픈 연인이 되기도 합니다. (지금이야 연애편지를 쓰는 이들이 거의 없겠지만, 과거에는 여러 연애편지에 인용되지 않았을까 짐작해보죠…)
요즘 한강에게는 이 ‘너’가 수달입니다. 한강 지류를 곳곳이 다니며 활약하는 수달언니들 소식은 지난 편지에 말씀드렸지요. 저희는 수달의 흔적을 찾아 다니는 것은 물론이고, 이제 샛강에 그들을 위한 집까지 지었습니다.
선생님들이 간절하게 기다리시고, 그 존재를 향해 적극 나아가는 ‘너’는 누구인가요? 저에게 요즘 ‘너’는 ‘코로나 없는 세상’입니다. 이제 일 년도 더 지난 코로나 사태가 하루 속히 끝나서 우리 다시 어울더울 만나고, 맘껏 웃고 떠드는 환한 벗들의 얼굴을 보고 싶습니다.
이 기다림이 간절한 만큼, 코로나 시대가 던진 화두를 곱씹어 보고 반성하기도 합니다. 제가 함부로 소비한 것들, 환경에 대한 무심함, 연결되어 있는 이웃들과 세계 시민들의 소중함을 간과하고 살았던 것을 후회합니다. 이제 앞으로는 무조건 서로 손을 잡아주고 연대하며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내일부터 시작되는 설 연휴 행복하게 보내세요. 몇 번 꽃샘추위야 더 오겠지만, 금새 샛강에는 매화와 봄까치꽃이 꽃을 틔우기 시작하겠지요. 이어 지천으로 피어날 개나리, 라일락, 애기똥풀이야 말할 것도 없고요. 아울러 버드나무 연한 초록 순도 꽃 못지않게 예쁘지요.
봄이 오는 샛강으로 놀러오시고, 좋은 기운 많이 얻어가시길 바라겠습니다. 황지우 시 전문을 편지 끝에 붙입니다. 선생님들이 기다리시는 ‘너’를 꼭 만나시길 소망하며…
2021.02.10
수달못 옆 달수네에서
한강조합 드림
<너를 기다리는 동안> _ 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에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는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데서 지금은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 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