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호강을 건너는 은여울중고등학교 학생들 C.김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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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여울
“비가 자신의 존재감으로 해를 젖게 하는 날이 세 번쯤이었어. 하늘이 뻥 뚫려 있는 것처럼 맑았던 날은 이틀이었나 그래.” (한결)
시시한 날들이야.
짜증나. 특히 여름은. 덥고 땀나고 눅눅한 거, 시도 때도 없이 비가 쏟아지는 거, 물이 찰박찰박 고여 있는데 모르고 밟아서 운동화가 젖는 거, 한참을 자고 나도 수업시간이 끝나지 않는 거, 샘들이 뭐라뭐라 떠드는 거, 급식이 맛이 없는 거, 편의점이 옆에 없는 거, 그런 것들이 다 짜증나.
뙤약볕이 내리쬐는 날, 길을 걸어가다 그만 멈추고 싶을 때가 있어. 짧아진 내 그림자가 너무 어둡다고 느껴질 때가 있어. 가방을, 신발을, 핸드폰을, 다 던져버리고 싶어져. 어둡고 무거운 그림자를 벗어나고 싶어. 그런 기분에 점점 치달을 땐 교실을 비켜나서 옥상으로 올라가. 옥상 가장자리에 서서 하늘을 보고 또 아래를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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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지나가고 가벼운 뭉게구름이 몽실몽실 흘러가는 하늘이, 땅을 내려다보면 핸드폰을 쳐다보며 걸어가는 친구들이, 고개를 들어 멀리 바라보면 탁하게 흘러가는 강물이 보여. 마지막으로, 한 번 훌쩍 날아볼까. 무거운 그림자를 지탱하며 서 있으면 나도 모르게 비틀거려. 어느새 아래에는 J샘이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어. 어느 순간 우리는 눈이 마주쳐. J가 우렁우렁 큰 소리로 말하지.
“여울! 더운데 거기서 뭐하냐? 아이스크림 사줄게. 얼른 내려와라.”
J는 내 대답도 듣기 전에 돌아서서 가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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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미
“두 사람의 그림자가 합쳐지면 더 짙어질까요?”
며칠 전에 영화 ‘퍼펙트 데이즈’를 봤어. 좋은 영화였어.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것 같아. 영화 속에서 주인공 히라야먀에게 다른 남자가 물어보지. 병이 들어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남자야. 글쎄요. 하다가 히라야마는 남자에게 직접 해보자고 해. 그림자를 겹쳐보는 거야. 중년의 두 남자가 강변에 서서 이리저리 몸을 움직여 그림자를 겹쳐보다가 계면쩍게 웃더라. 결론은 잘 모르겠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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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여울 너처럼 열다섯 살이었을 때, 나는 내 그림자가 싫었어. 가느다란 그림자조차 우울해 보였어. 그럴 때는 교실 한 구석에 앉아 책을 읽었어. 그리고 공부를 했지 뭐야. 영어 단어를 웅얼웅얼 외우고 나중에는 영어 교과서를 통째로 다 외웠지. 그러다 보면 지겨운 그곳을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재수생일 때는 종종 탑동 바다에 갔어. 벗어날 거야. 건너갈 거야. 파도치는 바다에게 다짐하듯 말했어. 공무원 시험을 보라고 닦달하는 아버지와 먹고 살 돈을 벌기 위해 고단한 어머니가 다 싫었어. 두부와 참치 캔을 사서 김치찌개를 끓여 먹고, 낡은 프라이팬에 콩나물과 고추장을 넣어서 볶아서 먹는 단조로운 밥상도 싫었어. 나중에 나는 서울에 올 수 있었어.
종종 열다섯 살의 은미를 생각해 볼 때가 있어. 언니가 물려준 플레어 치마를 입고 누구보다도 일찍 집을 나서서 학교까지 걸어가던 나. 무우말랭이 반찬만 있던 도시락이 부끄러워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교정 팽나무 그늘에 머물던 나. 멀구슬나무에서 매미가 시끄럽던 여름에 그늘진 방안에서 정철 영어 테이프를 듣고 또 듣던 나. 질긴 매미 울음처럼 한없이 이어질 것만 같던 그 여름의 시간도 가뭇없이 사라졌네. 이제는 모든 게 풍족하고 넉넉한 삶이지. 팽나무 아래 서 있던 열다섯 살의 은미를 만난다면, 사는 건 그럭저럭 괜찮은 거라고 말해주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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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은여울
융합수업을 한다고 미호강을 간대. 귀찮은 마음과 궁금한 마음이 서로 저울질을 하다가 궁금한 마음이 이겼어. 미호강은 학교 코앞에 있지만 가본 적이 없어. 사실 강이라는 게, 가서 놀거나 하는 곳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으니까. 강을 따라 펼쳐진 절벽과 산등성이처럼, 강은 그냥 풍경 아닌가 생각하지. 그렇게 치면 강에 가본 적도 없고 강물을 만져본 적도 없는 내 이름이 은여울이라는 게 우습지 뭐야. 은여울은 강에서 돌돌돌 노래하며 흐른다지.
외부에서 샘들이 왔어. 샘들을 따라 미호강변을 걸어 농다리를 건너 미르숲으로 갔어. 멀리서 보던 나무들이, 강물이, 백로나 왜가리 같은 새들이, 옴개구리와 산개구리 같은 작고 말캉한 것들이, 개미와 벌레들이, 서로 어울려 바글바글 살아가는 강과 숲을 보았어. 나보다 더 작고 보잘 것 없는 존재들이 이렇게나 많이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놀라워.
곤충 샘이 작은 파리를 하나 보여줬어. 천적을 속이려고 파리가 아닌 벌인 척 위장했지. 우리는 다 속았어. 천적들도 다 속았을 거야. 곤충 샘만 속일 수 없었지.
나는 벌인 척 위장한 파리에게 이름을 지어줬어. 비파리! (Bee 파리 또는 Be 파리) 비파리 비파리 중얼중얼 말하니까 사람 이름 같기도 하고 노래 가사 같기도 해. 난 조금 즐거워졌어. 비파리! 너 나랑 같이 파리에 갈까? ㅎㅎㅎ
나는 나중에 파리도 가고, 프라하도 가고, 아, 무엇보다 크레타 섬에 갈거야. 거기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가 있대. 거기 새겨진 묘비명을 읽어 볼거야. 나는 카잔차키스 말처럼 살아갈 거야.
‘나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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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형 공립학교 은여울중고등학교 학생들이 한강조합 생다진천 프로젝트 팀과 함께 융합수업으로 미호강 미르숲을 탐방했습니다. 이 글은 중3 이한결 학생이 남긴 후기에서 힌트를 얻어 상상을 보태어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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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호강 미르숲에서
2024.07.26
한강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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