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미씨의 한강편지 268_한강과 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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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 hangang 등록일24-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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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미씨의 한강편지 268_한강과 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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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수나무의 가을 C.오영철) 

어느 추워진 아침 입술에서 처음으로 흰 입김이 새어나오고, 그것은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 우리 몸이 따뜻하다는 증거. 차가운 공기가 캄캄한 허파 속으로 밀려들어와, 체온으로 덥혀져 하얀 날숨이 된다. 우리 생명이 희끗하고 분명한 형상으로 허공에 퍼져나가는 기적. 

(한강 소설 <흰> 중에서 입김 P72) 

 

지난 일요일에는 날씨가 참 가을다웠죠. 

높은 하늘과 투명한 햇살, 습기 없는 공기와 바삭거리는 낙엽 같은 것들에 기분마저 맑아지고 편안했어요. 저는 교회에서 봄에 한 번, 가을에 한 번 하는 야외예배에 참석했어요. 교인 부부가 주말농사를 짓는 이천의 농장에 옹기종기 모여 짧게 예배를 드리고 고기를 굽고 된장찌개 같은 것을 끓여 음식을 나누어 먹었습니다. 

 

아이들은 꽃에 깃든 곤충과 벌레들, 신기하게 생긴 열매들을 보느라 신나서 돌아다녔어요. 굵은 대추와 머루를 따서 먹으며 새큼달큼한 가을의 맛을 느껴보기도 했습니다. 붉은 맨드라미는 큰 얼굴을 땅 가까이 숙이고, 엉겅퀴 꽃 비슷하게 생긴 곤드레 꽃들이 빛이 있는 쪽으로 꽃잎을 가지런히 펼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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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기심 많은 아이들 C.김혜신)

자연에 나오면 목사님은 자연에 대한 경이로움과 창조주에 대한 감사함을 곧잘 말하죠. 이날은 쉼과 숨이라는 주제로 설교를 하시더군요. 숨 좀 쉬고 살자, 숨통이 트인다, 숨이 막힌다 등등 숨에 대한 표현들을 열거하며 숨을 쉬는 일이 생명을 이어가는 데에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말했습니다.  

 

한강 작가는 하얀 날숨이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이자 기적이라고 하고 있네요. 저 역시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편안히 숨을 쉬고 있습니다. 마시고 내쉬고 또 마시고 또 내쉬고 문득 어린 시절 몹시 말을 더듬던 순간들이 떠오르네요. 목구멍 안쪽 어디쯤 숨이 막혀 저의 목소리가, 발화하고 싶은 단어가 목 안에 갇히는 것 같죠. 

 

그렇게 몹시 말을 더듬으면서도, 영어라는 언어가 좋아서 영어 문장을 외우곤 하던 소녀였어요 저는. 영어말하기대회에 참여해서 운동장 조회대 앞에서 덜덜 떨며 기다리던 저에게 무뚝뚝하기만 하던 남자아이가 말했어요. 야, 저 앞에는 다 나무토막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숨을 천천히 쉬어 봐. 

 

저는 제 시야에 가득 담겼던 아이들을 나무토막이라고 상상하기도 어려웠고, 숨을 천천히 쉬지도 못했기에 영어말하기대회를 망쳤어요. 참담하고 부끄러웠던 기억이 20대가 끝나갈 때까지도 오랫동안 남았죠. 

 

그렇게 말을 잘 못했으니까, 저는 쓰거나 읽는 일을 좋아했어요. 자연스럽게 숨을 내쉬고 부드러운 말을 하기 어려울 때, 추운 방에 혼자 앉아 일기를 썼어요. 아이들이 놀릴까봐 두려워 교실에 남아 책을 읽었죠. 그래서 지금도 여전히 읽고 쓰는 걸 좋아해요. 제가 원하는 단어와 문장을, 얼마든지 써도 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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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읽은 한강의 책들)

#한강의 일 

생명들을 돌보는 일, 그러니까 숨을 쉬는 존재들을 지켜주는 일이 우리 한강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다 지켜줄 수는 없지만, 그가 종종 말하듯이, 할 수 있는 만큼 해보는 거죠 

 

그제 오후의 일이었어요. 그 날도 맑은 날이었죠. 잠깐 걸으려 샛강숲에 내려갔습니다. 평일이었지만 쾌청한 날씨여서 걷는 사람들이 꽤 보였어요. 제 앞에는 작은 강아지를 각각 한 마리씩 데리고 산책을 하는 여자들이 걷고 있었어요. 여자들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고, 강아지들은 까불대며 빨리 가느라 줄이 자꾸만 팽팽해졌죠. 

 

그러던 어느 순간 갑자기 강아지들이 사납게 소리치며 숲 쪽으로 달려가려고 했어요. 여자들은 건성으로 줄을 당겼어요. 강아지들이 너무 흥분해 보여서 궁금한 마음에 가까이 갔어요. 처음 보는 연갈색 작은 토끼가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있더군요. 가정에서 어느 가족들과 살았을 토끼였어요. 종종 사람들은 샛강숲에 토끼를 내다 버리죠. 그 토끼들은 사람을 피하지 않고 다가와서 맴돌기도 해요. 

 

어떤 이들은 토끼들이 무섭게 번식할 거라고, 어서 처리하라고 조언을 하기도 해요. 어떤 이들은 아무 풀이나 잘라와서 던져주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사진을 찍어요. 몇 년 전에는 추운 겨울을 잘 견뎌낸 토끼들이 있었어요. 마음 속으로 기특하고 고맙다고 생각했어요. 유난히 추운 겨울이었거든요. 그런데 봄이 한창이던 때에 어디론가 사라졌어요. 

 

이런저런 경우의 수를 생각해 보았지만, 마음 착한 어느 가족이 데려가서 잘 키웠다든가 하는 해피 엔딩은 상상하기 어려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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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샛강에 온 토끼들 C.오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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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가의 어린 새 C. 최종인) 

어제는 계단참에서 숨을 거둔 비둘기를 보았습니다. 볼품없이 팽개쳐진 듯 누워 있는 새 한 마리가 회색빛 계단에 있었어요. 옆에서 걷던 친구가 새를 조심스레 풀섶으로 옮겨 낙엽을 넉넉히 덮어줬습니다. 그가 그렇게 하는 동안 저는 애도의 말을 떠올렸어요. 

 

숨을 쉬는 존재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무탈하게 살아가기를, 어려운 순간들이 오더라도 잘 살아내기를 바라게 됩니다. 한강만 봐도,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존재들이 더운 숨을 쉬며 살아가는지 알게 되었어요. 보게 되고 알게 되면 그들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중랑천에는 벌써 원앙 선발대가 150마리쯤 왔다고 해요. 곧 수백 마리가 더 날아오겠죠. 올해도 새들과 함께 바쁜 겨울이 될 거 같아요. 새들의 숨과 쉼을 지켜주기 위해 할 일이 참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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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랑천 원앙 선발대 C.최종인)

#한강, 꽃 핀 쪽으로 

엄마, 저쪽으로 가아, 기왕이면 햇빛 있는 데로. 못 이기는 척 나는 한없이 네 손에 끌려 걸어갔제. 엄마아. 저기 밝은 데는 꽃도 많이 폈네. 왜 캄캄한 데로 가아. 저쪽으로 가. 꽃 핀 쪽으로. (한강 소설 <소년이 온다> P192) 

 

지난 10월 10일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았지요. 한 작가의 수상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축하하고 기뻐하는 일은 처음 봐요. 저 역시도 기뻤어요. 문학을 좋아해서 그렇기도 했지만 4.3 유가족이어서 더욱 그랬습니다. 그의 소설들 중에서 5.18을 다룬 <소년이 온다>와 4.3을 다룬 <작별하지 않는다>는 진혼의 노래이자 애도의 시들입니다. 

 

왜 캄캄한 데로 가느냐고, 기왕이면 밝은 데로, 꽃 핀 데로 걸으라고 엄마에게 말하던 어린 소년처럼, 작가는 어둠 속에 숨 죽이고 살아가야만 했던 사람들을 꽃 핀 쪽으로 불러내고 있어요. 

 

한강의 문장들을 읽다 보면, 그는 폭력의 반대편애 서 있구나, 그 반대편에서 더운 숨을 내쉬는 작은 존재들에게 마음을 내어주는 분이구나 싶어요. 우리 한강조합도 그렇게 폭력의 반대편에 서서 살아가려고 해요. 연약하고 흰 것들을 지켜내며 살아야겠어요. 

 

곧 서늘한 날들이 오겠죠. 아침 공기에 더운 입김이 기적처럼 피어날 날들이 다가오네요. 

 

평안하시길 빕니다. 

2024.10.18

한강 드림 

사회적협동조합 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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