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미씨의 한강편지199_자연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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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 hangang 등록일23-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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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미씨의 한강편지 199_자연과 이야기
아버지를 흙 속에 뿌리고 돌아온 밤, 부슬부슬 비가 내렸습니다. 언니네 집 창 밖으로 계곡에서는 희미하게 개굴개굴 소리가 들렸습니다. 

속절없이 내리는 비를 보며, 비가 많이 내려 아버지의 유해가 떠내려가면 어쩌나 하는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옆에 앉은 여동생에게 그 말을 하다가 동화 속 청개구리 마음을 알 것 같았습니다. 청개구리는 엄마 청개구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렇게 말을 안 듣다가, 엄마가 병들어 죽고 나서야 후회하며 처음으로 엄마 말을 듣고 개울가에 엄마를 묻었다지요. 

올 여름에는 비가 상당히 많이 내릴 거라는 예보를 들었습니다. 특히 제주도는 평소에도 아열대성 스콜 같은 비가 자주 내리는데 오죽할까 싶네요. 평생 고단한 삶을 살고 떠나신 아버지에게 효도를 다하지 못했던 저는 청개구리처럼 개굴개굴 울고 싶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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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고향마을 아버지의 빈 자리가 쓸쓸합니다.)
아버지가 몸져누워 마지막 날들을 보내는 동안, 칠남매 중에서 저는 이야기 담당이었습니다. 그건 제가 이야기하는 것 말고는 딱히 할 줄 아는 게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언니들은 돌봄에 능숙하고 지극했고 동생들은 민첩하게 아버지의 요구에 바로바로 응했지요. 그러나 저는 돌봄도 서툴고 아둔하여, 아버지의 손을 잡고 가만히 있다가 주섬주섬 이야기를 꺼내곤 했습니다. 

아버지도 아는 제 고향친구와의 첫사랑 이야기는 아버지를 즐겁게 하신 것 같습니다. 산소마스크를 낀 얼굴임에도 희미하게 웃으셨어요. 열 살 때 웅변대회에 나갔던 이야기도 했습니다. 그건 아버지가 저에 대해 무척 기특하고 뿌듯하게 여겼던 기억이니까요. 농사일에 바빴던 아버지가 어떻게 면사무소 소재지까지 나와서 저의 웅변을 지켜보았는지 지금도 의아합니다. 

이야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의 삶 속에 언제나 있습니다. 천일야화나 데카메론 같은 책들을 봐도 이야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지요. <데카메론>의 경우, 흑사병을 피해 피렌체를 떠나 어느 교외에 모인 선남선녀들이 서로 돌아가면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구성입니다. 전세계의 많은 이야기들은 서로 비슷하기도 하고, 섞이기도 합니다. 그건 이야기가 전파되기도 하고, 또 인간사 사는 모습이 유사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이야기는 자연에서 옵니다. 이야기의 시작인 신화만 봐도, 하늘과 땅, 나무와 꽃, 물과 불, 다양한 동물들이 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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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샛강생태공원에서는 '켈트 신화, 자연을 품다' 강좌가 열립니다. c.사회적협동조합 한강)
‘여기에 지혜의 연어라 불리는 특별한 연어 한 마리가 있습니다. 이 연어는 원래 평범한 연어였습니다. 하지만 지혜의 못에 떨어진 아홉 개의 개암나무 열매를 먹고 세상에 대한 모든 지식을 얻어서 지혜의 연어가 된 것인데, 한 소년이 손가락에 묻은 이 연어 기름을 핥다가 그 모든 지혜를 얻게 됩니다. (중략) 켈트신화는 이처럼 신기한 이야기로 넘쳐나는데 그중 많은 이야기가 식물-동물, 인간-동물-식물, 빛과 어둠, 삶과 죽음, 선과 악이 모두 연결되어 있고 순환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윤주옥 영문학자의 강좌 소개 글) 

인문의 숲으로 가꾸는 샛강생태공원에서는 올 초에 표정옥 교수를 모시고 삼국유사와 우리 신화 속 자연 이야기 강좌가 열렸습니다. 이번에는 켈트 신화 속 자연 이야기를 들어보는 강좌를 마련했습니다. 아일랜드와 웨일즈에서 탄생한 켈트 신화를 들으며 일상을 벗어나 멀리 여행을 해보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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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떴다 수달언니' 모임에서 수달언니들이 샛강에 사는 수달의 일상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c.박경화)
샛강에서 지내다 보면 매일같이 다양한 이야기들을 보고 듣습니다. 태풍에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선 버드나무 이야기, 버드나무와 연리목처럼 나란히 자라다가 한 번 쓰러지고 유팀장님의 도움을 받아 다시 살아난 팽나무 이야기, 범람 때 물에 쓸려 샛강센터까지 왔다가 끝내 탈출하여 어디론가 떠난 거북이 이야기, 먼저 죽어버린 청둥오리 수컷 곁을 떠나지 못하고 근처에서 애를 태우며 머물던 청둥오리 암컷 이야기, 고양이의 사나운 공격에 맥을 못 추던 뱀 이야기, 버려진 토끼 두 마리가 서로 만나 사랑에 빠지고 함께 토끼굴을 파고 살다가 사라진 이야기, 그리고 한강 물길을 따라왔다가 샛강에 머물러 살아가는 수달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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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샛강숲에서 꽃과 나무들과 교감하는 샛숲사 사람들 c.정지환)
수많은 식물과 동물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며 살아가는 샛강숲을 지키고 가꾸고 누리는 사람들도 늘어납니다. 이번 달부터는 ‘여의샛강 시민참여단 샛강놀자’애 선정된 8개팀이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떴다 수달언니’는 샛강 수달들을 모니터링 하며 그들의 사는 이야기를 들을 것입니다. ‘샛강 숲길을 걷는 사람들’은 꽃과 나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세상에서 가장 느린 걷기를 하기도 합니다. 장애인들과 함께 샛강에서 놀이를 하고, 추억과 이야기를 만들어가려는 팀들도 있습니다. 샛강의 식물들을 조사하여 그들의 삶을 기록하려는 팀도 있고요. 

자연이 건강하고 풍성하면, 그 안에 깃든 다양한 생명들로부터 믾은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오늘도 그런 자연을 지키고 가꾸는 손길들에 고마움을 표합니다. 또한 매일같이 성실하게 삶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선생님들께도 응원의 마음을 전합니다. 

무더워지는 여름, 건강하시길 빕니다. 

2023.06.22 
한강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