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미씨의 한강편지201_지렁이들의 대탈주

페이지 정보

등록자 hangang 등록일23-07-06

본문

은미씨의 한강편지 201_지렁이들의 대탈주
28773_1688541354.jpg
(오늘 아침 여의샛강생태공원에 물이 차오르자 지렁이들의 대탈주가 시작되었습니다.)
새벽 어스름 샛강숲에 들어선 지환은 기이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땅이 일렁이듯이 솟아오르고 꺼지기를 반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멈칫거리며 한발씩 걸음을 내디뎌 나아가 보았습니다. 움직이는 땅은 바로 지렁이들이었습니다. 지렁이들은 뒤엉켜 군무를 추듯이 솟아오르고 다시 땅으로 내려앉았습니다. 

밤새 샛강숲에 큰비가 내렸습니다. 강물이 불어 아래부터 물이 차오르기 시작합니다. 지렁이들의 대탈주가 시작되었습니다. 물난리를 피해서 그들은 파도를 이루며 기어갑니다. 어떤 버드나무는 지렁이나무가 되기도 했습니다. 

장마가 시작되고 샛강숲은 지렁이 천국이 되었습니다. 비온 뒤 이른 아침에 보면 지렁이들이 샛숲길을 가득 채우고 있어 기겁하게 합니다. 오늘 아침에는 물이 차오르는 샛숲에서 지렁이들이 탈주하는 모습을 봅니다. 숲에 이토록 많은 지렁이들이 있다니… 
28773_1688541384.jpg
(범람이 시작되자 지렁이들이 나무 위로 대피하고 있습니다.)
저는 내심 징그럽다는 생각을 하다가 문학적 상상을 해봅니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소설 <백년의 고독> 속 장면들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마르케스를 비롯하여 라틴 문학에서는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기법을 사용합니다. 뭔가 환상적이고 기이하며 마술적인 장면을 통해 라틴 국가들의 정치적, 역사적 현실을 비틀어서 담아내는 겁니다. 그렇다면 샛강숲 지렁이들의 삶을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한 번 그려볼까요. 

‘여름이 시작되자, 샛강숲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비가 내렸다. 나무들은 빠른 속도로 가지와 둥치를 키우고 뻗어 나가 하늘을 다 가려 버렸다. 해가 들지 않는 숲은 하루 종일 컴컴했다. 잉어와 준치 같은 팔뚝만한 물고기들 수만 마리가 하늘에서 떨어졌다. 물고기들이 버드나무와 뽕나무에 걸려 퍼덕거렸다. 물가에는 파도가 들썩였는데 자세히 보면 지렁이들로 만들어진 파도였다. 나무에 까맣게 지렁이들이 매달렸으며, 어디선가 오리떼 수백마리가 날아와서 지렁이를 먹었다.’ 

그제 오후에 샛강숲을 잠깐 걸었습니다. 강변에 있는 뽕나무숲은 어둑하고 부드러운 흙길이 있는 곳입니다. 거기 청둥오리 다섯 마리가 어정어정 돌아다니는 걸 봤습니다. 제가 다가가도 관심이 없더군요. 그들은 땅에 부리를 박고 부지런히 지렁이를 잡아먹고 있었습니다. 한참 지켜보았는데, 지렁이는 끝도 없이 나오고 오리는 엄청나게 먹어대더군요. 
28773_1688541426.jpg
(샛강 뽕나무숲에서 청둥오리들이 지렁이를 포식하고 있습니다.)
근래 샛강숲에 지렁이가 엄청나게 많습니다. 하루는 공원 팀장님들이 아침 내내 산책로의 지렁이들을 길섶으로 쓸었다고 하더군요. 올해 유난히 많이 보이는 지렁이들을 보며 왜 그런지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누구는 짝짓기 때문이라 하고, 몸을 말리러 나온 것이라고도 합니다. 정확한 이유는 좀더 알아봐야겠어요.  
우리 사람들도 자연의 일부로 함께 살아가지만, 자연 속 다른 동식물들은 어떻게 살아가는지 잘 알기는 어렵습니다. 샛강에 원래 그토록 지렁이가 많았던 것인지, 올해 더 많아진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들에게는 샛강숲과 땅이 먹고 살기에 적당한 것이겠지요. 지렁이가 많이 보인다고 해서 징그럽다고만 할 게 아니라 그들이 잘 살아가도록 가만가만 지켜보고 필요하다면 도와줄 일입니다. 어쨌든 오리들은 신나게 포식하고 있다는 걸 알았네요. 

샛강에 종종 나타나는 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누룩뱀 같은 뱀이 종종 출몰하는데, 뱀을 보게 되면 그냥 가던 길 가시라 하면 그만입니다. 절대 먼저 공격하지는 않으니까요. 강과 숲은 인간과 동물들이 같이 살아가고 이용하는 곳입니다. 샛강숲을 거닐다 보면 다른 동식물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때로 신기한 마음으로 구경할 수 있어요.  
28773_1688541541.jpg
(지난 6월 30일 여의샛강생태공원에서는 '셰익스피어 문학 속 자연과 인간' 주제의 강의가 열렸습니다.)  
#샛강에서의 셰익스피어 산책

가련한 오필리아야, 너는 너무나 물이 많구나.
따라서 나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련다. 그러나,
이건 우리의 본성, 부끄러움이 뭐라고 하든,
본성을 따라서 울 수밖에 없구나. 
(셰익스피어 <햄릿> 중에서 레어티스의 대사) 

지난 주 한강살롱에서는 진영종 교수님을 모시고 <셰익스피어 문학 속 자연과 인간>에 대해 강의를 들었습니다. 셰익스피어가 살았던 시대 사람들은 자연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문학작품을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당대에도 자연과 인간(문명)이 어떻게 이항대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합일할 수 있는지에 대한 모색이 있었음을 알았어요. 저는 일찍 오신 분들을 위하여 셰익스피어 산책을 가이드했는데요. 한 분이 ‘마음이 말랑말랑해지는 산책’이라고 해주셨어요. 멕베스의 비극적 대사를 낭송한 보람이 있었습니다. 

이번 주부터는 ‘켈트 신화 속 자연’을 공부하는 강좌도 시작됩니다. 인문적 상상력으로 자연에 대한 공감과 공존의 마음을 키워가시면 좋겠습니다. 
 
장마철 건강과 안전에 유의하셔요. 
 
지렁이들이 춤추는 샛강숲에서
2023.07.05
한강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