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미씨의 한강편지213_대추 한 알, 호박 한 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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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 hangang 등록일23-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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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미씨의 한강편지 213_대추 한 알, 호박 한 덩이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낱

(장석주 시 <대추 한 알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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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20일 미호강변에 모감주나무 30그루를 심었습니다.)

지난 주에 미호강 농다리를 건너 미르숲으로 들어갔습니다오후 들어 비는 제법 많이 내렸어요생태학습관에 둘러앉아 비가 내리는 밖을 바라보며 도시락을 먹었습니다비가 오기는 해도 소풍을 나온 것 같아 도시락이 맛있었어요점심을 먹고 나서는 숲 탐방을 했어요숲에서는 기분 좋은 나무 냄새흙냄새가 났습니다바닥에는 도토리가 잔뜩 깔려 있었고요더러 밤송이도 보였습니다새삼 가을이구나 싶었어요.

 

이 날은 현대모비스 임직원들과 함께 볼런투어 (Voluntour, 자원봉사와 여행을 함께 하기)를 갔습니다아침부터 흐리던 하늘에서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지만 키가 큰 모감주나무들을 심었습니다현대모비스와 한강조합이 미호강변에 처음으로 심는 나무이기에 세심하게 고르고 단단히 준비했습니다전날부터 가서 거친 땅에서 돌을 골라내고 바위를 깨고 푸석한 흙을 걷어내고 나서 비옥한 흙으로 채웠습니다구덩이를 적당한 간격으로 파고 물을 머금기 좋게 홈을 만들었고요나무를 놓고 흙을 채우고 다시 물을 붓고 흙을 덮고… 이런 일련의 과정들을 정성껏 한 다음에는 팀장님들이 남아 지주목을 세웠습니다나무가 단단히 뿌리를 내릴 때까지 도와주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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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공원에 모감주나무 꽃이 한창입니다.)  

여름이면 모감주나무에 노란 꽃들이 가득 피어납니다마치 황금 비가 내리는 것 같다고 해서 영어 이름은 Golden rain tree랍니다언제고 미호강가에도 우리가 심은 나무들이 황금비가 쏟아지듯 화사한 꽃을 피우겠죠그때까지 나무들이 잘 자랄 수 있도록 정성을 기울여야 합니다대추 한 알이 붉어지고 둥글어지는 데에도 태풍이천둥이번개가 몇 개씩 필요하다죠모감주나무가 파란 하늘을 배경삼아 노란 불꽃놀이처럼 피어나려면 몇 사람의 마음이손길이땀이 필요할까요나무들을 심던 날 우리 팀장님들은 저녁 늦도록 지주목을 묶고 나서 서울로 돌아왔어요.

 

대추 한 알이 둥글어질 때까지 무서리 내리는 몇 밤과 땡볕 두어 달도 필요하다고 시인은 말합니다오늘도 마침 누가 사온 대추를 먹었는데 잘 여문 대추를 씹으며 무서리와 땡볕과 초승달이 들어 있나 상상했지요모감주나무 노란 꽃이 우수수 지고 나면 초록 열매가 맺히기 시작하고 이어 까만 구슬 같은 것을 품게 되요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시간 동안 이 역시 고적한 여러 낮과 밤과 땡볕과 바람과 구름과 초승달이 있어야 할 겁니다.

 

미르숲에서 보았던 도토리나 밤도 마찬가지겠지요그런데 샛강에 대뜸 등장한 호박은 좀 달랐습니다대추는 저절로 붉어지지 않지만호박은 저절로 둥실 부풀어오른 것처럼 보였어요.

 

여의샛강센터 옥상은 원래는 황무지 같은 곳이었어요저희가 오기 전에는 동화 속 거인의 겨울나라처럼 꽁꽁 잠겨서 몇몇 관목들만 각자 살아가고 있었어요조릿대가 많았고 앵도나무와 화살나무가 콘크리트 벽에 잇대어 지냈죠그러다 지난 몇 년 사이 프랑스 사람들장애인들또 아이들이나 가드닝 봉사자들이 꽃씨를 뿌리고 흙을 골랐어요그리곤 올 여름에는 호박씨를 심었나 봐요어느 날 줄기가 슬금슬금 기어오더니노란 꽃이 몇 군데 피고이내 호박이 영글기 시작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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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상 한구석에서 자란 호박 두 덩이를 땄습니다.)

지난 주에 봤을 때 어른 주먹만 하던 것이 며칠 만에 제법 실하게 여물었더군요선영팀장님에게 호박 구경이나 하자고 불렀더니그녀는 이 정도면 따줘야 해요 하고는 뚝딱 두 개를 땄어요마침 그날은 한강살롱으로 염키호테 대표님의 북 콘서트를 하는 날이었죠김명숙 선생님과 선영팀장님그리고 은영대리님 셋이서 호박을 씻고 자르고 채 치고 부침가루를 솔솔 뿌린 다음 호박전을 만들었어요고소한 기름냄새가 퍼지자 우리들은 냉큼 달려갔어요처음 것은 조금 탔네… 하며 선 채로 몇 개 손으로 집어먹었어요어찌나 맛있던지부침개는 금방 먹어야 맛이네 하며 계속 집어먹었어요힘들게 전을 부치던 선영은 그런 저를 타박하지 않고 더 먹으라고 해주더군요이 날은 살롱에 오신 서른 명이 다 배부르게 드실 만큼 선영과 은영이 호박전을 계속 부쳐냈어요제 생각엔 북 콘서트도 화기애애하고 좋았지만또 다른 주인공은 호박전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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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상에서 자란 호박으로 만든 호박전이 많은 이들을 행복하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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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2일 염형철 대표의 ‘물이라는 세계’ 북콘서트가 화기애애하게 진행되었습니다.)

나머지 호박 하나는 이튿날 정은귀 교수님 강좌를 들으러 온 분들이 나누었어요호박은 그렇게 여러 사람들에게 뜻밖의 기쁨을 선사했습니다호박을 일부 나누어 간 정은귀 교수님은 곧바로 호박전을 만들고 페이스북에 글을 올리셨어요.

 

그렇게 둥그런 호박은 오늘 저녁 여러 식구들이 둘러앉은 식탁에 따뜻하게 올라갈 것이다호박의 공양이다.  호박을 나누어가지는 시간옆에서 1944년생 도봉구에서 전철 타고 오시는 분이 오늘은 나희덕 시인의 <어떤 출토>가 생각나요 하신다시를 좋아하는 마음들이 모여 만드는 신비한 감응.’(정은귀 교수님 페이스북 글에서)

 

제가 앞서 호박이 저절로 둥실 부풀어오른 것 같다고 썼지만요그게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아니죠사람은 씨앗을 하나 심었을 뿐이지만해와 달과 바람과 구름비와 흙과 흙 속의 미생물들이 서로 도와서 호박을 키워낸 것이죠호박 덕분에 며칠 입도 호강하고 마음도 넉넉했습니다.

 

이제 내일부터는 추석 명절입니다집집마다 많은 음식을 굽고 찌고 삶고 데치고 버무려 가족들의 밥상에 내겠지요음식을 먹으며 농산물을 키운 농부들과 자연의 수고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봐도 좋겠습니다호박 하나가 수십 명의 사람들에게 기쁨을 선물했듯이가진 것들을 주변에 나누며 더 큰 기쁨을 만드는 추석이 되었으면 합니다.

 

둥근 달님이 우리 마음 구석구석까지 밝게 비춰주기를.

행복하고 느긋한 추석 연휴 보내시기 바랍니다.

 

 

2023.09.27

한강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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