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미씨의 한강편지229_랑랑이가 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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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 hangang 등록일24-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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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미씨의 한강편지 229_랑랑이가 한 말

어제 사회적협동조합 한강의 새해 첫 이사회가 열렸습니다. 작년 한 해의 활동을 돌아보고 올해 활동을 논의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어려운 시절을 잘 견디고 적자 없이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에 서로 고마워했습니다. 이사회에는 특별히 중랑천에서 온 고양이 랑랑이가 함께 참석했는데요. 랑랑이에게 중랑천에서의 생활이 어땠는지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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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이사회에 함께 참석한 중랑천 구조 고양이 랑랑, 사람 곁을 좋아합니다.)

 #랑랑이의 이야기
성탄절 아침이었습니다. 아침부터 흰 눈이 펑펑 내려 세상이 온통 하얗게 뒤덮였습니다. 저는 베란다 창을 통해 눈송이가 끝없이 감나무 가지 위로 쌓이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어요. 아침 밥을 먹고 나서 실내에서 눈 오는 풍경을 하염없이 보노라니 슬슬 졸음이 왔습니다. 어느새 스르르 잠이 들었어요. 

잠이 막 들었을 때, 주인이 다가오는 기척을 느꼈습니다.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어요. 그는 저를 안고 캐리어에 넣었습니다. 오늘 크리스마스네. 우리 한 번 나가 볼까. 

차를 타고 어디론가 한참 갔습니다. 크리스마스 파티에 데려가려는 걸까요. 깜짝 선물을 주려는 것일까요. 캐리어 속 낡은 모포 위에 앉아서 저는 스쳐가는 창 밖 풍경을 불안한 마음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차는 비포장 길을 지나 어디선가 멈췄습니다. 차문을 열자 차가운 냉기가 사방에서 밀려옵니다. 

그는 저를 데리고 묵묵히 걸었습니다. 흔들거리며 나아가는 동안 눈송이가 계속 그의 검은 몸과 제 사이를 비집고 떨어지다가 사라지곤 했습니다. 이 소풍은 어디까지일까. 어서 아늑한 집으로 돌아갔으면… 저는 소풍이 시작되기 전에 벌써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물 비린내가 훅 끼치는 강가에서 그는 멈췄습니다. 더러 쓰러지고 마른 갈대가 어지럽게 자란 강변에 저를 내려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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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랑천에 사는 원앙의 자태가 아름답지요. C.최종인)

강 쪽에서 찬 바람이 불어옵니다. 눈은 계속 쌓여 세상은 환하고 강물은 더러 반짝입니다. 멀리 작은 모래톱에는 청둥오리들과 가마우지, 백로, 왜가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습니다. 물살이 느릿느릿 흘러가고 갈대와 버드나무들이 수런거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야옹. 저는 주인의 그림자를 향해 말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강가에서 담배를 한 대 천천히 피운 그는 저벅저벅 발소리를 내며 멀어져갑니다. 곧 저는 혼자가 되었습니다. 흘러가는 구름이 잠시 머물러 가기도 했지만 더럭 외롭고 무서웠습니다. 강물에서 몸을 뒤척이는 잉어들의 모습과 여기저기 낮게 날아 이동하는 새들의 모습. 그리고 하염없이 내리는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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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랑천에서 원앙 먹이를 주고 있는 사회적협동조합 한강 조합원과 자원봉사자들 C.함정희)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가까이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이어 달큰한 배추 냄새도 나고 알곡 냄새도 풍겼습니다. 몇몇 사람들이 조용조용 움직이며 배추와 볍씨를 뿌리고 있었습니다. 

“저기 넓적부리 있네. 물닭들은 참 많아요. 그런데 원앙들이 여기 안 보이네.” 

사람들은 쌍안경으로 새들을 관찰하며 먹이를 뿌려주고 있었습니다. 야옹야옹. 저는 작은 소리로 기척을 냈습니다. 그러나 저의 목소리는 바람 소리와 차 소리에 묻혀 그들에게 닿지 못했나 봅니다. 먹이를 뿌리고 쓰레기를 줍던 그들은 이내 멀어져 갔으니까요. 

밤이 되니 너무 추워서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몸을 아무리 작게 웅크려도 한기를 이기기 어려웠습니다. 배도 고팠습니다. 그러나 캐리어 바깥, 낯선 컴컴한 세계가 무서워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었습니다.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릅니다. 저는 하루하루 야위어 갔고, 목소리를 낼 기운이 없었습니다. 저는 점점 정물처럼 변하여 가는 숨만 쉬며 버티고 있었습니다. 

밤에는 가까이서 수달과 너구리도 지나고, 한 번은 고라니도 겅중겅중 뛰어 갔습니다. 새들은 배추와 볍씨를 먹으러 몰려와서 야단스러웠습니다. 수십 마리가 몰려와서 먹는 통에 저는 더더욱 갈대밭 속에서 숨을 죽였습니다. 

먹이를 주고 쓰레기를 치우는 사람들은 며칠에 한 번씩은 꼭 왔습니다.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채 지내며 저는 잠자고 꿈꾸는 시간이 늘었습니다. 아늑한 누군가의 품, 고소한 생선 냄새가 풍기는 음식, 따뜻한 잠자리가 그리웠습니다. 저는 갈대 속에서 버려진 쓰레기처럼, 아무도 찾지 않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새들 먹이를 주던 그 남자가 쓰레기를 치우러 찾아오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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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랑천에서 원앙 먹이를 주고 쓰레기를 치우는 자원봉사자들 C.사회적협동조합 한강)

남자는 낡은 캐리어가 버려진 줄 알고 쓰레기를 치우러 다가왔다고 합니다. 캐리어를 들자 생각보다 무게가 있어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 순간 남자와 저의 눈이 마주쳤습니다. 남자는 놀란 눈치였고, 저는 하악질 시늉을 했습니다. 저도 엄연히 존엄이 있다고, 저를 쓰레기처럼 버리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으니까요. 

남자의 흔들리는 발걸음을 따라 사람들이 있는 사무실로 왔습니다. 그렇게 저의 긴긴 크리스마스 소풍은 끝이 났어요. 그 소풍 동안 제가 본 것들은 많습니다. 강가에 서서 오래 울다 가는 사람들, 둥둥 떠내려오는 쓰레기, 부지런히 살아가는 작은 동물들, 그리고 겨울을 보내려 몰려온 철새들의 치열한 삶과 죽음… 새들에게 먹이를 주던 사람들 손에 이끌려, 죽음 가까이 갔던 제가 삶으로 돌아왔습니다. 새들을 살리려고 하던 사람들이 저도 살려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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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먹고 편안하게 누워 있는 랑랑이)

#은미씨의 이야기
랑랑이는 잘 있습니다. 

랑랑이가 중랑천에서 구조되어 샛강센터로 온 것이 지난 10일이니 일주일 남짓 되었습니다. 여전히 허겁지겁 먹고, 많이 먹고 싶어합니다. 오래 굶었으니까요. 그래도 하루가 다르게 편안해지고 있음을 느낍니다. 처음 며칠은 랑랑이를 두고 나오려면 문 앞까지 쫓아와서 우는 바람에 발길이 잘 떨어지지 않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다녀올게. 아침에 봐.”라고 말하고 나오면 얌전히 자기 자리에서 쉬거나 웅크리고 잠을 잡니다. 

며칠 전에는 일이 바빠서 김밥과 떡볶이를 배달시켜 점심을 먹었습니다. 마침 청소하러 오신 이선생님괴 랑랑이에게 선물을 들고 온 강고운 선생님 그리고 세연이가 있어 함께 먹었습니다. 우리가 점심을 막 먹으려는데 랑랑이는 옆 모래화장실에서 똥을 누었습니다. 

랑랑이는 똥을 잘 누고 모래로 덮었습니다. 기특하네. 그 말이 절로 나왔습니다. 오래 굶었던 고양이여서 먹거나 싸는 일에 어려움이 있으면 어쩌나 걱정을 했거든요. 랑랑이가 똥을 싸고 자리로 돌아가는 걸 지켜보며 우리는 김밥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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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랑천에 볍씨를 뿌리자 배고픈 원앙들이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C.사회적협동조합 한강)

 생명이 하는 일이 그렇습니다. 누구나 잘 먹고 잘 싸고 잘 자야 합니다. 우리 한강조합 사람들이 하는 일이 바로 생명을 돌보는 일이 아닌가 합니다. 랑랑이가 잘 먹고 잘 싸기를 바라듯이, 반갑게 찾아온 원앙들이 잘 먹고 겨울을 잘 나기를 바랍니다. 눈이 내리고 비가 와도 일주일에 두 번은 볍씨를 들고 가서 먹이터 여섯 곳에 뿌려주고 있습니다. 새들 쉼터와 서식지를 하트 모양, 물고기 모양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땅은 질척이고 때로 신발이 강물에 젖고 옷이 쉽게 더러워지기도 합니다. 그런 불편함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새들을 돕고 있습니다. 
올해는 어느 생명이라도 잘 먹고 잘 싸고 잘 쉬는, 그런 평온한 해가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원앙들이 추운 겨울을 잘 이겨낼 수 있도록 우리 한강조합 사람들은 계속 밥을 주겠습니다. 

함께 해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의 인사 전합니다. 

중랑천 강가에서 
2024.01.19
한강 드림   
사회적협동조합 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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