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미씨의 한강편지 263_산다는 게 흐름이 아니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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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 hangang 등록일24-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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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미씨의 한강편지 263_산다는 게 흐름이 아니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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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비자림의 숲과 하늘

지난 주말 고향 제주도에 다녀왔습니다. 가을 초입이지만 늦더위가 여전했어요. 제주에 가면 가장 많이 하는 것이 숲길을 걷는 것입니다. 이번에도 비자림, 절물자연휴양림, 관절오름 같은 곳들을 걸었어요. 

 

숲에 들면 몸도 마음도 편안해집니다. 높이 자란 나무들 사이로 올려다보는 파란 하늘이 곱습니다. 풀벌레 소리와 새들의 노래소리, 나뭇잎과 가지들이 뒤척이는 소리가 배경음악처럼 스며듭니다. 나무와 꽃의 향기가 은은하게 퍼진 가운데, 숲의 공기는 부드러운 물살처럼 온몸을 이완시켜 주지요. 천천히 걷다 보면, 여러 가지 생각들도 가지런해집니다. 

 

작년 여름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래, 제주도에서 머물다 보면 아버지 생각이 자주 납니다. 특히 숲을 걸을 때 그렇더군요. 혼자 걸어도, 또 언니랑 걸어도 그렇습니다. 아버지가 계셨으면 같이 명리동 식당에 가서 고기구이에 김치찌개를 먹었겠지, 아버지는 막걸리를 한 잔 하시고, 딸이 주는 용돈봉투를 점퍼 안주머니에 넣으시며 허허 웃으시겠지 은덕언니도 숲을 걸을 때는 아버지를 그리워합니다. 

 

은덕아. 슬퍼하지 마라. 산다는 게 흐름이 아니더냐. 

언니는 어느 날 숲을 걷다가 아버지의 이 말을 떠올립니다. 갑작스레 사형선고 같은 병 진단을 들은 날, 애닯아 하는 딸에게 아버지가, 나는 괜찮다, 하고 나서 이어 하신 말씀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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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타연에서 흐르다 C.염형철)

눈에서 입술로, 상류에서 하류로, 젊음에서 늙음으로, 살아있음에서 죽음으로, 높은 지대에서 낮은 지대로, 어제에서 오늘로, 그리고 내일로, 최초의 순간에서 점점 멀어지는 방식으로, 에너지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의 방향으로, 기억의 밀도가 높은 시간에서 낮은 시간으로 

 

흐르는 모든 존재는 

흐르는 동시에 내려가고 있다는 것을 

아래로 아래로 떠밀려가고 있다는 것을 

(나희덕 시 흐르다 부분) 

 

강물이 아래로 아래로 흘러가듯이, 우리의 삶도 흘러오고 흘러갑니다. 지겹던 무더위도 흘러갈 것이고, 대기를 찌르듯 여름을 꽉 채우던 매미들도 흘러가겠죠. 농밀한 향과 붉음으로 여기저기 피어나던 꽃들도 흘러가고, 녹음도 흘러가고 스러질 것입니다. 

 

갱년기의 우울감에 가라앉았던 언니의 마음은 흐르는 존재들을 가만히 응시합니다. 산다는 게 흐름이 아니더냐, 하시던 아버지의 말을 생각합니다. 그 흐름에 가만히 마음을 부려놓는 것, 그것이 숲에서 배우는 살아가는 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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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타연에 간 한강유람단 C.염형철)

#두타연에서 흐르다 

흐르는 모든 존재들은 아름답습니다. 흐르는 존재들은 연약하고 흔들리기에, 더 이상 돌아올 수 없는 시간으로 흘러가기에 아름다운 것 같아요. 흐르는 것이 순리이고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흐르는 것을 못마땅해 하는 사람들도 있는가 봅니다. 갑자기 산 깊은 계곡, 흐르는 물에 댐을 짓고 홍수를 막겠다는 계획들이 세워집니다. 흐르는 물을 보며 살아가던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합니다. 돈도 필요 없고, 댐도 필요 없으니 흐르는 것을 그냥 두라고 합니다. 개발이 혹시 가져다 줄지도 모를 경제적 편익이 아름다움과 자연스러움을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을, 흐르는 물을 평생 보고 살아온 사람들은 알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 한강유람단은 댐을 짓겠다는 계획이 발표된 양구 두타연을 다녀옵니다. 금강산 가는 길목인 두타연은 숲과 계곡이 더없이 아름다운 곳입니다. 계곡 가는 길 곳곳에 댐 건설 반대 현수막들이 어지럽게 걸려 있습니다. 한강유람단 사람들은 경치에 취하여 걷고, 나뭇가지와 열매들로 댐 반대 또는 No dam 글자를 만들어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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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주민들의 댐 반대 현수막들 C.염형철)

#미호강에서도 흐르다

여름이면 반복되는 홍수 피해에 대해 정부는 댐이나 제방을 쌓는 계획들을 냅니다. 해를 거듭할수록 늘어나는 홍수나 가뭄, 산불 피해들도 결국 기후위기가 가속화되며 더 심해질 텐데요. 한강조합이 하는 일들, 그러니까 나무와 꽃을 심고 가꾸거나, 습지를 만들고 생태계를 개선하는 일, 수달과 원앙, 물고기와 곤충들이 살기 좋은 자연을 만드는 일이 기후위기를 완화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저기 댐과 제방 건설 계획들이 속속 세워지니, 자연을 돌보는 일만이 아니라 댐과 제방을 막는 활동까지 하게 생겼습니다. 

 

미호강에서는 지난 해부터 모감주나무와 왕버들을 심고, 강변 자투리 땅에는 꽃들도 심었습니다. 메밀 씨앗도 뿌렸는데 때마침 메일꽃이 흐르더지게 피었습니다. 여기에도 홍수를 막기 위한 제방을 쌓겠다는 계획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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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밀꽃과 습지 C.박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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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중랑천에서 만난 원앙 손님 C.함정희)

흐르는 모든 존재들이 잘 흐르게, 강물이 막히지 않게, 강에 깃든 작은 생명들이 조용조용 살아갈 수 있게, 우리는 지키는 일들을 해야 합니다. 오늘도 한강 사람들은 흐르는 작은 존재들을 돌보느라 분주합니다. 오늘 미호강에서는 제비들이 날아다니고 있고, 중랑천에는 첫 원앙 손님이 왔습니다. (벌써!) 지난 겨울 원앙 밥을 부지런히 줬더니, 소문을 듣고 왔을까요? 우리 강에 찾아온 원앙 손님을 다정하게 맞이해야겠습니다. 

 

더위가 여전하니 가을 기분은 나지 않습니다만, 곧 추석이네요. 시간이 또 흘러 달은 둥글게 차오르겠지요. 

 

다가오는 추석 평안하고 행복하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흘러가고 흘러오며 다정한 마음도 나누시기 바랍니다. 

 

2024.09.12 

한강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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