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한 마리 산 숲을 빠져나와 벌판을 지난다 길 위에 꽃 지는데 초록 돋아드는 햇살 설렁이는데 눈 안에는 들판 들판에는 그렇게 많은 싸리꽃 일렁이는 시간을 빛 속에 나누어주고 있는 싸리꽃 말의 눈 안에서 싸리꽃은 얼마나 많은 씨앗을 하늘로 올려보내고 있었던가
(허수경 시 ‘말 한 마리’ 부분)
암사 강변 고라니에게,
그 날이 12월의 마지막 일요일이었던가 그랬지. 암사생태공원을 찾아가는 길은 어렵더라, 강변도로를 몇 번 왔다갔다 하다가 겨우 주차장 진입로를 찾을 수 있었어. 겨울 오후의 암사숲은 가끔 오가는 산책객 말고는 인적이 드물어 고요했어.
억새 같은 마른 풀들이 서로 몸을 부대끼며 서걱거리는 소리, 붉은머리오목눈이 떼가 덤불 사이로 날아들며 내는 작고 청량한 소리가 간간히 날 뿐이었어. 나무 아래로 저 멀리 유유히 흐르는 한강이 보였어. 샛강숲이나 마찬가지로 첫눈에 부러진 나무들도 보이고… 그렇게 암사숲을 거닐다가 너를 보았지. 너의 우아한 몸짓과 따듯해 보이는 몸, 맑고 무심한 듯한 눈길. 우리는 서로를 한참 바라보았어. 오래 봐온 이웃이라도 되는 듯이, 너는 나를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천천히 걸어갔어. 강가로 다가가니 그곳엔 너보다 더 어려보이는 고라니도 혼자 있는 게 보였어.
암사생태공원은 어떤 곳일까, 어떤 자연의 식구들이 살고 있을까, 우리가 올해 운영을 맡게 된다면 어떤 일들을 해나가야 할까. 그런 것들을 알아보기 위해서 간 길이었어. 물론 전에도 간 적이 있지만 기분이 달랐어. 전에는 손님으로 갔다면, 이번에는 그 곳에서 일을 할 수도 있겠다 싶은 가능성을 꿈꾸며 갔으니까.
너를 봐서 기분이 좋았어.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너의 눈빛이 다정하다고 느꼈어. 아니, 내가 너에게 다정한 마음을 품어서 그렇게 느꼈을 거야. 그곳에 사는 너를, 너의 친구들을 지켜주고 싶고,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 고라니 네가 먹고 쉬고 놀고 은신할 수 있는 공간이 많도록 말이야. 너희들은 암사숲에서 살고, 아이들과 어른들은 가까이서 너희들을 보겠지. 손을 뻗어 만져볼 수는 없지만, 너의 들숨과 날숨을 가까이서 느끼고 덩달아 행복할 거야. 복잡한 마음 같은 것은 잠시 잊어버리고, 너의 아름다움만 하염없이 바라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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